아주 어릴 적 성탄절 전날 밤에 부모님을 따라서 자정미사에 간 기억이 난다. 성탄예식은 보통 주일미사보다도 길었던 것 같았고 성당 안에 있는 모든 전등이 꺼지고 각자가 가지고 온 촛불에 불을 켜서 성당 안이 은은한 분위기로 시작이 되었던가? 꽤나 길었던 미사가 끝나고 추운 겨울날 찬바람이 불어오던 어둔 새벽 거리를 부모님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좀 더 자라서는 성탄이 되기 전에 같은 학년의 친구들끼리 '마니또(manito)'라는 것을 했다. 마니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니또는 어느 날 어린 소녀와 눈먼 노인이 마차 앞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멈추어버렸다고 한다.
어린 소녀와 눈먼 노인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마니또는 그러한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마니또는 인간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시간을 멈추어서 구해주었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많은 혼란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제우스는 마니또에게 시간을 관장하는 일을 빼앗아 버리고 대신 인간들을 도와주는 수호천사의 일을 맡겼다고 한다.
후에 이탈리아에서 마니또라는 말은 주변에 있는 어려운 친구들을 모르게 도와주는 수호천사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탄절 한 달 전에 같은 반 친구들이 모여서 서로의 마니또를 뽑는다. 자신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내고 서로가 다른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뽑는다. 물론 자신만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자신이 뽑은 친구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성탄 날 아침에 모여서 자신이 뽑은 친구들의 이름을 말하고 그동안 어떤 기도를 했는지 말하면서 그 친구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을 건네주는 것이다. 대림시기 동안 나의 수호천사인 마니또는 누구인지 궁금해 하면서 또 자신이 수호천사가 되어서 기도해야 하는 친구를 보면서 흐뭇해 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해마다 성탄이 되면 떠오른다.
신부가 된 지금은 어린 시절의 마음이 설레던 성탄의 느낌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해마다 다가오는 성탄이 치러야 하는 행사로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미국의 성탄은 한국의 성탄 보다 더 빨리 시작이 되는 것 같다. 한국도 성탄이 되기 한 달 전부터 거리에서는 성탄 캐럴이 울려퍼지면서 성탄과 연말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이 바로 집집마다 정원에 성탄장식을 하는 것이다. 교회나 성당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화려하게 성탄 장식을 꾸미면서 성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탄을 기다린다는 기다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성탄은 한 달 전부터 온 것이다. 이미 와 있는 성탄에는 기다림이 없다. 그리고 성탄의 의미도 상실한 지 오래다. 성탄의 의미와 성탄의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연말을 알리는 하나의 축제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없는 성탄 비어있는 구유 구세주가 없는 성탄을 지내는 것이다. 마니또를 뽑아서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탄의 설렘이 사라져가고 있다. 성탄은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아기의 모습으로 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 옛날 2천 년 전에 오셨을 때와 같이 누워계실 자리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면서 우리 각자가 아기 예수님을 모실 구유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이다. 회개의 삶이 우리가 준비해야하는 구유이다. 우리 안에 각자가 준비한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기쁨일 것이다.
# 091222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