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돌아보니 뜻하지 않게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어떤 빚은 늘 기억하며 살았고 어떤 빚은 그저 세월 속에서 잊고 살았습니다. 그때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눈가를 적셨던 노래들. 내 삶의 한 페이지였던 노래들. 그 가사들. 그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보고, 한참 하늘을 보기도 했었는데. 노래에 진 빚이 많았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노래가 감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노래는 사정없이 내 감정을 울렸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노래의 힘은 더 깊어갔죠. 사춘기를 지내고 세상을 맞닥뜨리면서 온갖 일들로 머리와 가슴이 아팠습니다. 깍두기 몇 개에 라면 한 그릇, 그리고 소주 반 병. 그렇게 버릇처럼 홀로 소주를 기울였습니다. 때로는 낭만처럼 다가왔지만 참으로 아팠습니다. 젊은 날의 초상, 그 소설처럼. 젊은 날에는 낭만도 아픈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술집이 그대로 노래방이기도 했습니다. 언제든지 부를 수 있게 노래 한두 곡은 준비해야 했고, 벗들의 노래도 마치 내 노래인 양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가사를 외우고, 서로의 노래를 따라 하면서 노래는 그대로 삶이 되었습니다. 서로의 노래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폐부를 찔렀습니다. 아팠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입니다. 벗들의 노래를 나도 부르게 되고, 나중엔 내 노래 곡목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유행가라고 하는 노래는 한 시기에 유행처럼 지나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유행가는 그 시기에 내게로 온 노래입니다. 시대를 풍미한 노래이고, 그대로 그리움으로 남은 노래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때는 들었지만, 그 이후에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노래가 진짜 유행을 타는 노래였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빚을 진 노래는 세월이 지나도 그때의 기억마저 담고 남아있는 노래들입니다.
김민기 선생의 노래는 다 좋았습니다. 때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고음으로 부르지 않아도 되어 편한 마음으로 시도하였으나 그 맛을 살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감정을 울렸던 노래입니다. 시보다 더 시 같고, 철학책보다 더 철학적이었던 그 노래들을 기억합니다. 양희은 선생이 불러서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던 노래입니다. 그중에서‘봉우리’라는 노래에 진 빚이 큽니다. 낮은 내레이션에서 나도 몰래 숨이 막혀왔습니다. 사는 게 그런 거구나. ‘한계령’도 나를 움직인 곡입니다.
정태춘 선생의 노래 역시 그대로 시였습니다. 가사가 노래를 어떻게 돋보이게 하는지 보여줍니다. ‘시인의 마을’은 노래가 시일 수밖에 없음을 그대로 보입니다. ‘북한강에서’는 처음 들었을 때 여러 번 되풀이하여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 ‘강물 속으로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오.’ 가사의 구절마다 스스로를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탁발승의 새벽노래’는 깨달음의 선시처럼 다가왔습니다. 후에 들은 정태춘 선생의 ‘아, 대한민국’은 그저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정수라 씨의 ‘아, 대한민국’과 비교하여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차창이 어둡습니다. 금방이라도 비가 한바탕 쏟아질 듯합니다. 운전하는 내 귓가에 오랜만에 김민기, 정태춘, 양희은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노래에 받았던 감동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내가 저 노래들에 빚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는 행복한 빚입니다. 자주 듣는 것으로 노래 빚을 갚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