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신 것만 해도 그렇다. 마야 부인이 당시 풍속대로 친정에 애 낳으러 길을 가다 낳았으니 바로 룸비니 동산이다.
부처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마 편안한 궁정에서 왕자 대접을 받으며 말도 타고 가마도 탔을 것이다.
하지만 굳은 결심으로 출가를 단행한 이후에는 타고 온 애마도 돌려보내고는 두 발로 걸어 걸어 그 당시의 유명한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마음에 차는 가르침이 더 이상 없음을 알고는 별수 없이 스스로 닦기로 하고 다섯 도반들과 함께 여섯 해 동안 말 할 수 없이 심한 고행을 하였다.
하지만 극심한 고행이 도를 깨치는 바른 길이 아님을 알고는 네란자라 강가로 나가 우유죽을 얻어 드시고 기력을 차리셨다. 이를 보고 실망한 도반들이 떠나 버리자 핍팔라 나무 아래에 홀로 자리를 잡아 생사 결단의 깊은 명상에 드셨다. 이러기를 이레 동쪽 하늘에 샛별이 빛나는 순간 위없는 두루 바른 깨침을 얻고 부처가 되셨다.
부처님은 맨 먼저 떠나간 다섯 도반을 찾아 길을 나섰다. 마침내 사르나트의 사슴 동산에서 이들을 찾아내고는 처음으로 진리를 전하시니 이후 나이 여든이 되실 때까지 마흔다섯 해 동안을 걷고 또 걸으신 중생 교화의 첫걸음이셨다.
그러다 생의 마지막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 위에서 열반에 드시는데 두 그루의 사라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제자들도 그가 깨친 진리를 전하려고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중국에도 닿고 한국에도 이르렀다.
이렇게 부처님은 길 위에서 나서 길을 걸어 진리를 찾아다녔고 진리를 깨치신 후에는 몸소 걸어서 사람들에게 이를 전했으며 마침내 길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길 위에서 전한 그 첫머리 진리가 무엇인가? 그건 당신이 신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진리를 깨친 사람 곧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중생들은 어떤 신이나 신격화 된 존재에 기대지 말고 먼저 부처님이 깨치시고 알려 주신 이 진리를 믿고 의지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믿고 기대라는 말씀이시다. 곧 법을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 삼는 것이니 이것이 법등명 자등명이다.
만약 부처님이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그 대행자라면 이렇게 고생하며 먼 길을 걸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와라 뚝딱 하고 점보제트기를 만들어 내거나 하다못해 축지법이라도 쓸 수 있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모든 중생들이 저절로 즉각 도를 깨쳐 부처가 되도록 앉아서 손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 세상에서 괴로움이란 것을 아예 원천적으로 없애 버리면 더 간단하다. 그러면 수행이고 성불이고 필요가 없고 불교라는 것도 처음부터 생겨날 건덕지가 없어진다. 그런 것도 못하면 전지전능하다고 하기가 좀 그렇다. 왜냐면 그 말은 모든 것을 싸그리 알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고 있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어쩌나.
아무튼 이렇게 길을 걸으며 진리를 전한 신 아닌 성자께서는 온 세상 중생들을 가르치시고 이들을 괴로움에서 건져내시는 크나큰 스승이요 위대한 영웅이 되셨다. 절의 대웅전은 바로 이 큰 영웅 곧 대웅을 모신 집이다. 이제 우리는 그 앞에서 복만 빌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가르침을 몸소 나누어 짊어지고 길을 나서서 방방곡곡 널리 나누어 줄 차례다.
# 091222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