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것은 자라는 것이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배우는 것은 지식을 쌓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배움이 고통이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배우는 건 좋은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논어의 시작은 늘 깨달음을 줍니다. 배우고 틈만 나면 익히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는 선언이 논어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배울까요? 무엇을 배웠기에 그리 기뻤을까요? 반대로 질문을 던지자면 무엇을 몰라서 고통스러웠을까요?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면 배울 필요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몰라도 되는 것을 배울 때 오히려 고통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배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배워야 하니 그 시간이 괴로울 수밖에요.
배움이 기쁨이 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내 고통을 더는 겁니다. 옛사람도 그러했겠지만 지금도 비슷한 고통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두려움입니다. 병이 들어 아프고,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고, 두려움입니다. 죽음도 두렵습니다. 이 세상을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두려움이 커집니다. 내세가 궁금하고, 전생이 알고 싶은 이유일 겁니다. 아프지 않기 바라고, 행복하기 바라는 것은 모두 고통을 바라보는 내 자세와 관련이 됩니다. 이러한 자세를 배우는 겁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으로 되지 않게 배웁니다.
누구에게 배울까요? 우리에게는 고마운 스승이 있습니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눈앞에서 만날 수는 없으나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음은 기쁜 일입니다. 경전이라고 하는 책, 고전이라는 책은 가르침의 향기를 자아냅니다. 그 향기를 맡으며 우리는 고통을 달래고, 기쁨을 찾습니다. 그런 게 행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제 인류의 스승을 직접 만날 수 없을지 모르나 그 스승에서 이어져 온 배움이 전통은 만날 수 있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부처, 예수 등은 제자에 제자를 거쳐 지금에 이어져 있습니다. 좋은 스승은 스승의 말씀이나 자세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가르침과 배움의 기쁨을 스승은 들려줍니다. 눈앞에 보여줍니다. 고마운 순간입니다. 저는 스승의 가르침에 늘 기뻐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스승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동안 뉴욕주립대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박성배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2009년 선생님 학교에 연구년을 갔을 때 선생님의 책을 번역했었습니다. ‘어떤 한국인의 불교에 대한 논의’라는 책입니다. 출판이 목적이 아니라 공부가 목적이었기에 더 배움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참선과 깨달음이라는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번역했던 건데, 최근에 참선 강의를 한다는 교수의 소식에 기회가 되면 출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공부해야겠네요.
또 한참 동안은 전헌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의를 정리하며 강의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강의록은 책의 분량을 넘을 정도이고, 폭과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강의록 정리도 여러 번 읽고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기쁨을 줍니다. 저에게만 들려주시는 강의라는 황홀한 착각을 합니다. 그렇게 저를 위로하는 요한복음 강의를 수없이 듣고 있습니다. 이 강의록은 잘 정리해서 출판하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서정범 선생님이 일본에서 출판하신 ‘한국의 샤머니즘’이라는 책을 아침마다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한 보람을 느낍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학부에서 박사과정까지 다양하게 들었기에 책에서도 목소리를 듣습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면서 선생님의 말투와 목소리까지 담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지가 10년이 넘었지만 책을 통해, 번역을 통해 선생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 책도 출판이 목적이 아니라 공부가 목적입니다만 한국에 출판되지 않는 내용이어서 선생님의 뜻을 잇는다는 점에서 더 공부가 깊어지면 세상에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늘 이렇게 배우니 참으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