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인물열전] 헤롯 대왕, 폭정-탐미 두얼굴의 통치자
이상명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 신약학
결국 그는 병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가장 사랑하였던 아내 미리암과 장모를 살해하였고 무수한 신하들과 세 명의 아들들도 처형하였다. 헤롯 대왕에 대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의 아들들보다는 차라리 헤롯의 돼지들이 낫다"는 촌평을 하였다고 하니 그의 광기서린 잔인함은 널리 회자된 가십거리였던 모양이다.
헤롯 대왕은 이두매(혹은 에돔) 출신이었던 안티파터와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의 공주 키프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안티파터가 로마의 유력자들과 좋은 친분을 유지한 덕에 헤롯 대왕은 25살 되던 때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이후 로마 원로원의 지지로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여 34년간을 다스렸다.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처형으로 얼룩졌던 헤롯 대왕의 가정사는 기원전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가 죽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헤롯 대왕은 뛰어난 외교술과 정치 감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격동의 정국을 헤쳐 나갔지만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을 무참히 살해한 무자비한 정치가였다. 또한 로마의 건축술로 그가 다스렸던 전 영토를 치장한 뛰어난 건축가였지만 그 영토 안에 경찰국가를 조성하여 살벌한 공포정치를 실행했던 인물이었다.
헤롯 대왕은 곳곳에 궁궐 극장 원형경기장 요새(특히 마사다)를 건축하였고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추억하며 솔로몬 성전의 2배 크기(길이 457미터 폭 297미터)로 화려하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통치자로서 이방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한 헤롯의 정치적 야망이 깃든 원대한 건축 프로젝트였다.
복음서에서 묘사된 예수님의 반-도시적 정서는 아마도 헤롯 대왕이 광기와 야망으로 쌓아올린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무언(無言)의 반응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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