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침에] 지워짐으로써 선명해지는 것들
세상이 온통 거대한 가마솥 안으로 들어앉았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산비탈에서 내려다보면 대지는 제 몸을 지우느라 여념이 없다. 분명한 선을 긋고 서 있던 능선들은 흐릿한 묵화가 되어 낮게 엎드려 있다. 안개는 산과 들의 경계를 허물며 대지 위에 하얀 나라를 건설했다. 안개는 욕심이 없다. 높게 솟은 봉우리도, 깊게 파인 골짜기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하얀 숨결을 나누어준다. 그 품 안에서 나무들은 머리만 내민 채 가쁜 숨을 몰아쉰다. 턱 끝까지 차오른 안개의 무게가 버거울 법도 한데, 숲은 고요한 운무 아래서 가장 평온한 휴식을 취하는 듯 보인다. 발밑을 본다. 안개의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짙은 흙이 단단하게 발등을 붙잡고 있다. 세상이 지워지는 순간에도 우리가 딛고 선 땅만은 이토록 선명하고 정직하다. 눈앞의 풍경이 모두 사라져 불안해질 법한 순간,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은 비로소 “너는 여기 살아있다”고 일러주는 유일한 이정표가 된다. 내가 딛고 선 이 한 뼘의 대지는 안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실존의 증거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름 모를 새소리.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그 울음소리가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타고 맑게 울려 퍼진다. 눈을 감아도 세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안도감이 새소리에 실려 온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평온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덕분일 것이다. 우리는 늘 명확한 것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목표는 뚜렷해야 하고, 관계는 선명해야 하며, 성과와 지표는 숫자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눈앞이 흐릿해지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 삶에도 이런 가마솥 무렵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선을 지우고, 날 선 계획들을 뽀얗게 지워버리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뜨거운 증기 속에서 쌀이 뜸을 들여 맛있는 밥이 되듯, 이 하얀 정적 속에서 삶의 깊이를 뜸 들여야 한다. 안개에 몸의 절반을 내어준 나무를 본다. 잎사귀의 모양새를 뽐내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오직 줄기의 중심만을 지키며 서 있는 모습에서 경외심이 느껴진다. 화려한 외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나무의 ‘근본’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수식어와 사회적 직함이 안개처럼 덮여 지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안개는 세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단 한 가지에 집중하게 해주는 축복의 장막이다. 산을 내려가는 길, 여전히 안개는 발목을 휘감고 있지만 마음은 더없이 평화롭다. 지워짐으로써 비로소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 사람의 눈에는, 평범한 숲길조차 성소(聖所)처럼 보인다. 나를 지워야 비로소 내가 선 자리가 보인다는 것, 오늘 저 안개가 내게 건네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거룩한 기다림이다. 나의 삶도 이 하얀 정적 속에서 조금 더 묵직한 울림을 가진 존재로 여물어가길 바랄 뿐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선명 새벽 산비탈 가마솥 무렵 사회적 직함
2026.04.09. 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