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 휴머노이드 시대, 사회적 합의는
김영하 소설 ‘작별인사’의 주인공 철이는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인간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인간처럼 사랑하고 고통을 느끼며 성장하지만 어느 날 예고 없이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폭력과 차별,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인간이 만든 지능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사회적 폭력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22년 당시만 해도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간의 공존은 소설 속 이야기였다.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로봇, 기억의 디지털 저장, 감정을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3년 사이 상황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은 이미 산업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급성장 중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휴머노이드 서밋에는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현장에서는 로봇이 옷을 접고 교육 시연을 하며 기계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모습이 공개됐다. 기술 시연은 연구 단계를 넘어 상용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휴머노이드 관련 벤처 투자 규모는 2020년 4260만 달러에서 올해 28억 달러로 증가했다. 5년 만에 약 65배 성장이다. 가정용 휴머노이드를 개발 중인 스타트업 피규어는 기업 가치가 390억 달러에 도달했다. 테슬라가 개발 중인 옵티머스는 세계 노동 구조를 재편할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2050년 휴머노이드 시장 규모가 5조 달러에 이르고 10억 개 이상의 로봇이 인류 사회 안에서 활동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장 도입도 이미 시작된 상태다. 물류 기업들은 두 팔로 수십 킬로그램의 화물을 들어 나르는 로봇을 창고에 투입했고 일부 세탁소에는 옷을 자동으로 접는 로봇이 등장했다. 병원, 상점, 군사 시설, 교육 현장에서도 휴머노이드 활용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산업계가 휴머노이드를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휴식이 필요 없고 사고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인건비 부담이 없다. 이 변화는 노동 시장을 넘어 문화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완전 AI로 제작된 가상 배우 ‘틸리노우드’가 공개됐다. 배우 노조는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디지털 복제 기술이 발전하면서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는 데이터로 저장되고 활용되고 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실제 배우보다 관리 비용이 낮은 AI 인물이 현실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관객이 감동하는 연기가 반드시 인간 배우만의 영역인지에 대한 논쟁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김영하의 ‘작별인사’가 지금 현실이 대입되며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소설 속 인간 사회는 휴머노이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용소에 가두고 파괴하며 철저히 인간과 다름으로 규정한다. 작가는 기술 그 자체보다 인간의 공포, 배제, 우월 의식이 더 큰 위험 요인임을 보여준다. 현재 휴머노이드 산업 역시 기술 발전 속도에 발맞춘 사회적 합의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일자리 감소에 대한 우려, AI 배우를 둘러싼 갈등, 개인정보 침해 논란은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휴머노이드 기술이 가져올 가장 큰 변화가 고용 문제를 넘어 인간 정체성에 미칠 영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로봇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만 인간인가’이다. ‘작별인사’는 이 질문을 휴머노이드라는 존재를 통해 집요하게 제기한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사람과 로봇이 직장과 가정, 예술과 의료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휴머노이드를 단순한 도구로 인식할 것인지,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따라 미래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작별인사’의 철이가 던진 질문은 더는 소설 속 문장이 아니다. 새해를 앞두고 휴머노이드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가 답해야 할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휴머노이드 사회 휴머노이드 산업 휴머노이드 시장 가정용 휴머노이드
2025.12.23.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