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해 매주 한 번씩 산을 찾는다. 큰 산악회도 다녔지만 지금은 60,70대 7~8명이 매주 같은 산을 오른다. 이 산을 6.5마일가량 올라가면 바로 볼디산의 정상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목적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점심시간이 된다. 취사 준비를 하고 준비해온 고기를 굽고 다양한 야채를 내놓는다. 커피에 디저트까지 일행과 나눈다.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커피물까지 끓여 주는 것은 항상 K이다. 그는 솜씨가 좋고, 식사를 준비해 나누어 주는 것도 좋아한다. 취사 장비도 그가 가장 많이 가져온다. 당연히 그의 백팩이 가장 무겁다. 항상 웃으며 고기를 나누어 주고, 밥을 볶아 나누어준다. 하지만 정작 그는 많이 먹지 않았다. 왜 그렇게 적게 먹느냐고 묻자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웃으며 장비를 정리하는 그를 보며 ‘저런 귀한 성품은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노력해서 얻은 것일까?’ 생각해 본다. 만약 나도 솜씨가 좋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저런 성품으로 태어나지도,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뉴욕에 있을 때는 가끔 대여섯명이 큰 병원에 위문을 가야 할 때가 있었다. 병원에는 특유의 냄새와 무거운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병원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병상의 수척한 환자 모습을 보는 일도 편치않았다. 그래서 늘 뒤편에 서 있었다. 죽음 가까이에 있는 환자의 손을 잡고,얼굴을 만지며 위로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부러웠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C는 멕시코 봉사활동 등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솜씨 좋은 그는 이용 기술을 배워 몇 달은 이발을 하지 못한 것 같은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손을 잡고 기도해 준다.말은 서툴러도 손의 온기가 그들의 마음을 열리게 했다. 깨끗해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 굳은 얼굴도 웃음을 띠게 만든다. 아예 일찍 은퇴하고 현지에 머물며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 일부를 헌신하고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 본인이 잘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세상 풍파의 파편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어서 겉모습에서는 재능을 알아 볼 수 없어도 그들 모두는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겸손해지면 남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인간의 감정 중에 ‘연민’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데, 요즈음은 ‘겸손’이 더 요구되는 것 같다. 국가나 이웃 간에 서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며 극단적으로 나누어진다면 미래사회는 불안하게 된다. 겸손해지면 생각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서로 편 가르지 않고 함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꾸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최성규 / 베스트 영어 훈련원장열린광장 겸손 요구 병원 분위기 취사 장비 멕시코 봉사활동
2023.04.11. 19:01
“겸손한 자가 다스릴 수 있고 근면한 자가 소유할 수 있다.” 랠프 월도 에머슨·미국 시인한마디 겸손 근면
2022.04.11. 18:03
“인생은 한 평생을 통해 겸손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제임스 M. 배리·영국 극작가 한마디 인생 겸손
2022.03.22. 18:26
“겸손해야 통치할 수 있고, 수고해야 가질 수 있다.” 랠프 월도 에머슨·미국 시인한마디 겸손 통치
2021.12.02. 18:45
“인생은 겸손을 배워가는 오랜 수업 과정이다.” 제임스 매튜 배리·영국 작가한마디 인생 겸손 제임스 매튜
2021.11.28. 13:48
비 갠 뒤/ 홀로 산길을 나섰다/ 솔잎 사이에서/ 조롱조롱/ 이슬이 나를 반겼다/ ‘오!’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만 이슬방울 하나가/ 툭 사라졌다 정채봉 시인의 ‘생명’ 전문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훑어보는데 오래전 사진 하나가 눈에 뜨인다. 사오십대 여자 여섯 명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십여 년 전쯤 무슨 행사를 끝내고 찍은 것 같다. 활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 여섯 명 중에 세 명이 근래에 명을 달리했다. 급작스럽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코로나를 겪은 지난 2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90년대 초, 미국에 온 나는 모든 게 낯설고 어설프기만 했다. 한국에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았지만 활동 기간이 짧아 아쉬움만 컸고 뭘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여기도 문학단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섯 명은 그때 만나 동인 모임을 했던 문우들이다. 함께한 세월이 꽤 길다. 시간을 쪼개 문학토론회도 갖고 동인지도 펴내며 함께 문학의 길을 도모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동인 모임은 시들해져 시나브로 사라졌다. 관계도 미온적이 되어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해 오고 있었다. 사진 속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정말 있었던 걸까 아득해지기만 한다. 시간이란 참 야멸차다. 잊힌다는 게 얼마나 매정한 일인가. 한 시절의 열정을 담고 있는 사진 한 장은 등 푸른 생선처럼 아직도 퍼덕이는 듯도 한데 말이다. 살다 보면 누군가와 척을 져야 할 때가 있다. 금방 풀고 화해를 하기도 하겠지만 오래 풀지 못하고 지내기도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음해를 당하기도 한다. 사람의 관계는 생물과 같아 수시로 변한다. 관계의 요동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만도 아닌 자연스러운 변이과정이기도 하다. 팬데믹은 우리의 삶을 위축시킨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외롭고 슬프게 한다. 그러나 사람을 멀리할 수밖에 없게 된 이즈음의 상황은 아마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야 한다는 역설 아닌가 싶다. 취향이 달라서, 성격이 달라서, 정서가 달라서, 이런저런 구차한 이유로 멀어졌던 사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는 걸 알게 하려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해본다. 죽음이 삶보다도 쉬워지는 나이가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어떤 경로로 헤어져야 할지 모른다. 그가 먼저 떠날지 내가 먼저 떠날지. 먼저 떠난 이들은 남겨진 자들의 추억 속에서 희미하다. 감사의 계절이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생명이야말로 은혜중의 은혜다. 도처에 죽음이 산재해 있는 것 같이 우울한 팬데믹 시대에 살아갈 얼마간의 시간을 확보한, ‘살아 있음’은 무엇보다 큰 감사임은 자명하다. 살아 있으므로 겪어야 하는 일들,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상처라든지 삶이 주는 고초라든지 그것이 비록 치명적인 아픔이라 할지라도 감사로 바꿔야겠다. 살아있으므로 겪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감사의 조건 아니겠는가.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살아있는 자들만의 특권이다. 아픔까지도 감사여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생명은 질긴 듯도 하지만 ‘오’하고 환호하는 사이 툭 사라지는 이슬방울처럼 여리기도 하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겸손 이슬방울 하나 동인 모임 활동 기간
2021.11.23. 17:40
“겸손한 자만이 통치하고, 일한 자만이 소유할 것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미국 시인한마디 자만 겸손
2021.11.14. 1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