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믿음의 두 얼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기리라”(마태복음). “믿음이 없으면 지혜가 생기지 않고, 지혜가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화엄경). “믿음은 법을 담는 그릇이다”(원불교). 모두 신앙생활과 마음공부에 있어 믿음의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다.   ‘1+1=2’ ‘하늘은 파랗다’처럼 과학적,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은 믿음이 필요 없다. 종교는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추상적 진리나, 마음, 사후 세계 등을 다루기 때문에 믿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을 ‘믿을 신’자를 써서 신자, 신도라도 하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한 제자가 성자에게 “제가 진정 믿으면 어떤 일이 가능합니까?” 성자는 “믿음이 바르면 바다도 건널 수 있다.” 제자는 그 말을 그대로 믿어서 물 위를 걸어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이를 의심하며 물 위를 걸었던 다른 제자는 빠져 죽었다는 예화가 있다. 스승이 지붕에 소를 올려 매라고 하면 의심 없이 매어야 한다는 고사도 교무 수학기간에 들은 적이 있다. 이를 의심하는 것은 스승을 저울질 하는 것으로 비판 받거나, 중근병(수행자의 오만을 비유한 표현)이라 하여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간주된다.   ‘재산을 바치면 업장이 소멸됩니다.’ ‘우리 종교를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은 마귀에 세력입니다.’ ‘저의 말은 진리이며 의심은 죄입니다.’ 잊을만하면 나타나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단체의 주장들이다. 필자가 수학기간에 들었던 기성 종단의 예화와 소위 말하는 사이비, 유사종교의 주장들이 완벽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이비, 유사종교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제도권 종교에서도 무조건적 믿음은 종종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종단의 자율성’에 대한 해석이다. 종단의 자율성은 교리, 신앙, 의례, 조금 더 나아가 법규 제정에까지는 적용 될 수 있다. 단, 제정된 법규의 해석은 종단의 자율성을 벗어나는 영역이다. 즉, 교리적으로 진리와 믿음에 대한 규정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 사회적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법규에 공화제라도 되어있으면 그것이 원리와 제도 중 어느 것을 의미한다는 정도의 해석 자율성은 가질 수 있지만, 사전적, 사회적 해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독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기성 종단에서도 정당하지 못한 이유들로 법규의 왜곡된 해석과 적용이 일어나고, 이런 경우조차 최고 지도자에 대한 비뚤어지고 과도한 믿음으로 성자의 가르침과 공동체 질서가 훼손되는 위법이 용인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진실과 정의를 선도해야 하는 종단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험상, 종교생활에 있어 믿음은 없어서는 안 되는 덕목인 것이 맞다. 다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개인의 수행과 사회에 적지 않은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비난해 마지않은 소위 사이비 종단들의 폐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믿음이 조금만 비뚤어지고, 조금만 과장되면 어느 종단에서든 일어 날 수 있는 일들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나 성당, 절의 성직자 분께서 지붕 위에 소를 올려 매라고 하면 의심을 갖고 한번쯤은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현대인의 바른 신앙생활이라 하겠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원 명상 센터삶의 향기 얼굴 사이비 유사종교 사이비 종단들 경험상 종교생활 
                                    2025.11.03.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