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 조현용] 고유어와 한자어 수사 이야기
우리말의 순수성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어휘는 수사(數詞)입니다. 수를 나타내는 말은 대부분의 언어에서 고유어입니다. 그래서 언어의 친근 관계를 비교할 때, 수사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 유럽어의 경우에는 수사의 일치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알타이어에서 수사의 일차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고민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도 고유어 수사의 일치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어의 수사는 아예 두 길로 나뉘었습니다. 고유어계 수사와 한자어계 수사입니다. 한국어에 한자어계 수사가 많은 부분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유어 수사와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등과 일, 이, 삼, 사 등이 그렇습니다. 하나, 둘, 셋, 넷은 다른 말을 꾸밀 때, 즉 수관형사로 쓰일 때는 한, 두, 세, 네로 모양이 바뀝니다. 하지만 다섯부터는 모양이 같습니다. 물론 열한, 열두 등으로 다시 바뀝니다. ‘하나를 선택하다와 한 개를 선택하다’, ‘다섯을 선택하다와 다섯 개를 선택하다’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유어 수관형사와 한자어계 수관형사는 일정한 규칙을 보이기도 합니다. 뒤에 한자어 단위명사가 오면, 한자어계가 쓰이고, 고유어 단위명사가 오면 고유어 관형사가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한 송이, 두 송이’라고 하는데 비해, ‘일 인, 이 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뒤에 한자어 단위명사가 오더라도 고유어 관형사가 쓰이기도 합니다. 한 권, 한 병 등이 그렇습니다. 한편 고유어계와 한자어계가 동시에 같은 단위명사에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권과 일 권, 한 장(張)과 일 장(章)이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권(卷)은 한자가 같은데, 장은 한자가 다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유어계 수관형사는 전체를 나타내는데, 한자어계는 순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다섯 권’은 책이 다섯 권임을 의미하지만 ‘오 권’은 한 권일 수 있습니다. 이는 ‘세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삼 장’과는 뜻이 전혀 다릅니다. 시간의 경우는 세 시 삼 분 삼 초처럼 표현합니다. 시, 분, 초는 전부 한자어 단위명사이지만 시의 경우는 고유어 관형사가 쓰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여기에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고 봅니다. 시와 분, 초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시는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예전에는 자시, 축시, 인시 등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시는 오랫동안 우리말처럼 생각되었을 겁니다. 반면에 분과 초는 실생활에서 쓰인 지 오래되지 않아서 한자어 의식이 강했을 것으로 봅니다. 즉 생활 속에 자주 쓰이는 단위명사의 경우에는 고유어 수관형사가 쓰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전체를 나타내는 말에 고유어가 쓰이고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 한자어 수관형사가 쓰인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1인(人)과 1명(名)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일 인, 한 명’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한자어로 오랫동안 쓰이면 우리말로 인식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어지만 한자어라는 의식이 약해진 것입니다. 우리말 수사에는 고유어와 한자어가 명확히 구별되지만, 이미 언중의 의식 속에서는 한자어도 우리말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한편 우리말과 일본어의 수사가 거의 일치하지 않지만, 고구려어 수사와 현대 일본어가 닮은 점이 많아서 주목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지명에 나타나는 수사 중 ‘3, 5, 7, 10’은 일본어와 같은 계통의 수로 보입니다. 언어의 접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조현용 고유어 한자어 한자어계 수관형사 고유어계 수관형사 한자어 수관형사
2025.08.17.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