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 벌거벗은 꿈
우리말에서 꿈과 관련이 있는 서술어는 ‘꾸다, 가지다, 있다’ 정도일 거다. 이 중에서 ‘꾸다’는 ‘꿈’과 동원어여서 흥미로운 어휘다. 우리말에는 이런 동원어 구성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잠과 자다, 얼음과 얼다 등이 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즉 ‘자다’의 명사형이 잠인지, 잠이라는 말에서 ‘자다’라는 표현이 나왔는지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어휘는 불과 붉다, 신과 신다, 발과 밟다 처럼 명사에서 용언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어휘의 경우는 반대로 동사에서 명사가 생긴 예로 보이는 것이다. 살다와 삶, 쥐다와 줌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꿈은 가지기도 하고 꾸기도 한다. 잘 때 꾸는 꿈인지, 깨어서 꾸는 꿈인지에 따라 의미와 사용이 달라진다. ‘가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로 희망을 나타낸다. 반면에 ‘꾸다’는 주로 잘 때의 꿈이지만, 희망을 나타낼 때도 쓸 수 있다. ‘있다’는 주로 희망을 나타낼 때만 쓰인다. ‘꿈이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꿈이라는 말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공통점 때문이리라. 허황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게 꿈이다. 꿈을 꾸는 것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다. 밤에 잠 속에서 꾸는 꿈은 무의식의 세계다. 꾸려고 해도, 꾸지 않으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은 억지로 안 된다. 어릴 때 나는 떨어지는 꿈이 많았다. 무서웠다. 높은 곳에 아찔하게 서 있다가 발을 헛디딘다. 끝없는 추락은 공포 그 자체다. 이렇게 끝인가 보다 하고 떨다가 보면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난다. 꿈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면 키 크는 꿈이라고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두려움의 크기에 비해 키는 생각만큼 자라지 않았다. 약간 아쉽다. 더 떨어졌어야 했을까? 아마도 나는 꿈이라는 무의식 속에서도 하루를 사는 게 무서웠나 보다. 떨어지는 꿈을 계속해서 꾼 것은. 사춘기 시절, 청춘의 시대. 그 시절의 가엾은 나를 위로하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떨어지는 꿈 대신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온몸의 힘을 스르르 빼면 나는 공중으로 맘대로 날아오른다. 공중부양 능력이 꿈속에서는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 으쓱한 마음이 가득했다. 가고 싶은 대로 날아다니면서 가벼워진 나를 즐겼다. 새벽에 꿈에서 깨어나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때 나는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는 나날이었나 보다. 그때는 헤엄치는 꿈도 많았다. 사실은 수영도 잘 못 하는데 꿈속에서는 물살을 잘 가르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다시 그 꿈을 꾸고 싶다. 잘 나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최근 몇 년간 꾸는 꿈속의 나는 벌거벗은 모습이다. 도대체 시도 때도 없다.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중요한 자리에서도 벌거벗은 내 모습이 나타난다. 깜짝 놀라 몸을 가려보지만 뛰는 심장을 어찌할 수 없다. 어찌어찌하여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잠에서 깬다. 그렇게 놀란 가슴으로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본다. 깨어났지만 여전히 부끄럽다. 내보이고 싶지 않은 거짓된 내 모습이 많아서일까? 나는 내가 숨겨놓은 나를 잘 안다. 부끄럽다. 내가 나를 아는데 누가 누구를 욕하랴. 함부로 남을 평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일까. 내 실수가 두렵다. 실수 그 자체보다 남의 시선이 더 두렵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벌거벗은 채로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깊은 부끄러움이다. 나도 이제 좀 편해지고 싶다. 그런데 산을 힘겹게 오르고 돌아온 날, 운동장을 몇 바퀴 뛰고 온 날은 꿈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기억도 없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쉬나 보다. 그런 날은 새벽에 깨지도 않는다. 그렇다. 새벽 꿈이 두렵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좋은 꿈을 위해서라면 좋은 생각과 좋은 인연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시간이 온다. 삶과 꿈과 깨달음이 하나가 된다. 삶이 엉망이고 불안 속에 있는데, 좋은 꿈을 꿀 리가 없다. 오늘도 벌거벗은 꿈을 꾸고 새벽에 이 글을 쓴다. 아직 멀었다, 나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꿈이지만 희망 공중부양 능력 동원어 구성
2026.01.25.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