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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귀뚜라미 때문에 가을이 온다

숨이 막힌다. 9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일주일 넘어 계속되고 있다. 요즘 더위는 평년 남가주 날씨가 아니다. 전에는 햇볕은 따가워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뜨겁고 건조했던 더위가 습하고 끈적거리는 기후로 변해가고 있다. 에어컨을 오래 켜 놓으니 몸이 찌뿌드드하다. 몸살이 날 것 같다.   밤이 되어도 여전히 후덥지근 하지만, 에어컨을 끈 채 창문을 열고 자리에 눕는다. 열린 창문으로 요란한 풀벌레 소리만 들려온다. 그중 으뜸은 귀뚜라미 소리다. 벌써 철이 이렇게 되었나. 찬 바람이 불어야 풀벌레가 우는 줄 알았더니 이 더위에 너희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안 되겠다.   베개를 들고 거실로 나온다. 마루에 얇은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한다. 조용한 집안에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언제부터인가 집안에 동거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다른 곤충과 달리 귀뚜라미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여 가끔 눈에 띄어도 못 본 척 그냥 두었더니 그 수가 늘어난 모양이다.     하지만, 울음소리가 이렇게 시끄러운지 미처 몰랐다. 너는 어쩌다 내 집에 들어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 주인의 잠까지 방해하며 울어댄단 말이냐.   저 녀석은 수컷이 분명하다. 귀뚜라미는 수컷만 운다고 들었다. 짝짓기할 때가 되면 날개의 돌기를 서로 비벼서 소리를 내는데 그게 바로 우는소리라 했다. 암컷을 부르는 소리다. 멀리 있는 암컷을 부를 때는 큰소리를 내고 가까이 있는 짝과 사랑을 나눌 때는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지금 저 녀석의 소리는 멀리 있는 짝을 부르는 소리임이 분명하다.   어릴 적, 솜씨 좋은 동네 오빠가 여치 집을 만들어주었다. 반들반들 노란빛이 나는 밀짚으로 만든 여치 집은 집안에 걸어두어도 장식품처럼 멋이 있었다. 대청마루 서까래 기둥에 매어 놓은 여치 집에는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귀뚜라미나 여치가 들어가 울어 댔다. ‘또르르르, 치르치르.’     저녁을 마친 식구들은 쑥대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마루에 누워 더위를 식혔다. 여치 집에서 풀벌레들이 울자 우리는 그것을 흉내 내어 소리를 내었다. 신기하게도 녀석들은 울음을 딱 멈추었다. 우리가 따라 멈추면, 그들은 침묵을 깨고 다시 울어 댔다. 그들이 울면 우리도 울고 멈추면 따라 멈추길 반복하며 귀뚜라미와 돌림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어서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는 노래가 아니었을까.   옛날 풍류를 아는 양반들은 여치 집을 가까이에 걸어두고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즐겼다는데, 아마 그 흉내를 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저 소리가 하나도 즐겁지 않다. 무언가로 바닥을 두드리면 귀뚜라미는 일순 소리를 멈춘다. 그러다 조용해지면 다시 울어댄다. 제발 소리를 멈추어 나로 잘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다.     누군가는 반박할지 모른다. 요즘 귀뚜라미나 풀벌레 소리를 저장하여 수면을 유도하는 백색소음이라고 값을 내고 듣는다는데, 대가 없이 울어준다는 녀석을 왜 구박하는가 하고 말이다.   귀뚜라미, 여치, 베짱이, 풀벌레…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귀뚜라미 우는 밤’ 유년의 가을을 아련하게 만들었던 동요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막막한 밤하늘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막연한 무엇을 그리워하면서. 아마도 유년에서 사춘기로 넘어가는 시간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이희승 선생은 ‘청추 수제’에서 다섯 가지를 일컬어 가을을 상징하는 소재로 삼았다. 벌레, 달, 이슬, 창공, 독서, 다섯을 불러와 가을이라는 이름을 완성하였다. 그중 첫 번째 소재 벌레를 통해 귀뚜라미를 가을의 전령사로 소개했다. 낭만이 있는 많은 이들도 귀뚜라미를 가을의 손님이니 가을의 소리니 하며 이름을 지어 올렸다.   가수 안치환은 나희덕의 시, ‘귀뚜라미’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그가 노래한 귀뚜라미는 시골집 초가지붕과 싸리로 만든 울타리가 아닌, 도시의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우는 귀뚜라미다. 지금은 매미 소리에 묻혀 그의 울음은 아직 노래가 아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에 매미는 가고 이제는 그의 세상이다. 어둡고 습한 밤이 오면 숨 막히게 울어댄다. 누구의 가슴 하나 울리는 노래이길 바라면서. 때를 기다리는 건 귀뚜라미나 사람이나 매일반이다. 지금은 그의 시간, 모든 것은 한때다.   이 외에도 시를 사랑하고 가슴이 따뜻한 많은 사람이 귀뚜라미를 노래했다. 가을을 부를 때는 녀석도 함께 불러올렸다. 바로 곁에서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그의 소리에 잠은 이미 천리만리 달아나 버렸다. 어느 가슴에 닿으려고 저리 울어대는가. 네가 보내는 타전 소리가 세상에 시달리고 지친 어떤 이에게 다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냐.   녀석의 수명은 일 년밖에 되지 않는다. 가을이 오면 짝짓기를 한 암컷은 땅속에 알을 낳고 죽는다. 수컷 역시 힘을 다해 짝짓기하고 추운 겨울에 이르러, 알을 낳고 죽은 암컷처럼 땅속에서 죽는다. 겨우 일 년, 신의 섭리대로 종족 번식에 이바지하고 떠나는 셈이다.   무더위 속에 가을이 숨어있다. 귀뚜라미 때문에 가을이 오는 모양이다. 귀뚜루루 귀뚜루루…. 온 힘 다해 울어대는 저 녀석들 덕택에. 정유환 / 수필가문예마당 귀뚜라미 가을 귀뚜라미 울음소리 귀뚜라미 소리 귀뚜라미 여치

2025.09.1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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