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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유월의 소년

유월이 오면, 우리 집안에는 한 소년이 먼저 떠오른다. 빛바랜 사진 한장 속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그리움이 고여 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책가방 대신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야 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던 시절, 펜을 쥐어야 할 손으로 총을 들어야 했던 열여덟 소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큰아버지가 속한 부대는 치열하게 남하하던 중공군에 맞서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처절한 고지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포성으로 뒤흔들리던 1951년 6월, 큰아버지는 그날의 포화 속으로 청춘을 남긴 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의 잔인함은 남겨진 이들에게 더 가혹한 상처를 남겼다. 전황이 너무도 급박했던 탓에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사망통지서 한장만을 손에 쥔 채, 자식의 뼈 한 조각 찾지 못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의 이름 석 자를 가슴 깊이 묻고 살아가야 했다. 기다려도 돌아올 수 없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보낸 세월은 두 분에게 또 다른 전쟁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유월이 오면 할아버지는 유난히 말씀이 없으셨고 할머니의 눈가에는 늘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때는 그 이유를 미처 알지 못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젖은 눈망울 뒤에 아직도 마르지 않은 전쟁의 상흔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휴전선 어느 고지의 차가운 흙 속에 홀로 남겨졌을 아들을 가슴에 품은 채, 두 분은 평생을 견뎌 오셨다. 그것은 한 가정의 비극을 넘어 이 땅의 수많은 부모가 감당해야 했던 전쟁의 가장 크고도 쓸쓸한 대가였다.   온 나라가 눈물로 출렁이던 해가 있었다. 1983년 여름, 밤낮없이 이어지던 TV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통해 ‘잃어버린 30년’의 애달픈 선율이 온 거리에 울려 퍼지던 때였다. 사망통지서를 받았으면서도 할머니는 어쩌면 아들이 어느 곳에서 기억을 잃은 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끝내 놓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름과 군번을 신청해 두고, 밤새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끝내 기적은 찾아오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모습은, 할머니에게 오래전부터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이 되살아난 듯했다. 그것은 죽는 날까지도 자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지막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내 품의 자식들이 어느새 그때 큰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지나고 나서야 조부모님의 아픔이 비로소 내 가슴으로 건너왔다. 털끝 하나만 다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앞에 어린 자식을 내보내야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들을 기다리며 흘려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자식을 키워낸 시간의 무게만큼, 두 분이 품고 살아야 했던 슬픔 또한 더욱 깊이 다가온다.   그리운 아들의 묘소 하나 가져보지 못했던 한은 세월이 흘러 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새겨진 이름 앞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 큰아버지는 지금 유해를 찾지 못한 수많은 호국영령과 함께 그곳에 잠들어 계신다. 비록 육신은 차가운 DMZ 어느 고지에 남아 있을지라도, 나라를 위해 바친 젊은 영혼만큼은 현충원의 품 안에서 안식을 찾았으리라.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 곁으로 떠나셨다. 이제 포탄 소리도, 긴 한숨도 닿지 않는 곳에서 고등학생 모습 그대로인 아들을 품에 안고 있을 것이다. 헤어진 세월만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평생 가슴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도 풀어내고 있을 것이다.    다시 찾아온 현충일의 하늘은 눈부시도록 푸르다. 전쟁은 한 소년의 시간을 열여덟에 영원히 묶어두었고, 한 어머니의 가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새겼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비극이 멈추기를, 더는 그 어떤 삶도 포화 속에 멈춰 서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 소년은, 끝내 열여덟에 머문 시간 속에서 지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김윤희 / 수필가열린광장 유월 소년 할아버지 할머니 그때 큰아버지 품의 자식들

2026.06.0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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