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단순하지 않은 원칙과 현실
예비교무 시절, 기숙사 규율부장을 맡은 적이 있다. 기숙사 규정에는 ‘밤 10시 소등’ 규정이 있었다. 규정 유지를 위해 10시가 되면 각 방을 돌며 점검을 했고, 때로는 강제 소등도 불사했다. “내일 과제가 있는데” “급하게 보내야 할 이메일이 있는데” 등 동료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예외를 두기로 하면 한이 없고, 더구나 성직을 지망하는 예비 성직자에게 구성원 간 약속인 규정은 더 엄격히 적용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성직자가 되고 보니, 원칙과 현실의 경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교당 연말 탁구대회에서 상금으로 100달러를 받았을 때만 해도 소득 신고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듬해 교화대상으로 상금 500달러를 받았을 때에도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법 원칙을 어긴 것은 분명하다. 의도적 탈세일까.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지금까지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일은 아니라 해도, 그래도 성직자라면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공항에서 부치는 짐이 2파운드 초과할 때, 사정을 해 볼지, 성직자답게 번거롭지만 원칙대로 할지 고민도 한다. 성직자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물론 이런 류의 고민은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현금 소득의 신고 여부, 소규모 리모델링의 허가 여부 등 일상에서 원칙과 현실의 경계를 마주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원불교에서는 화이불류(和而不流·어울리되, 휩쓸리지 않음)를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는 먼저 화합하라고 하셨다. 원칙보다 인정과 자비를 앞세우라는 말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고, 법과 원칙만을 앞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원칙과 현실에 대해 어떤 표준을 가져야 할까. 첫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원칙이 현실보다 우선이라는 기준은 놓지 말아야 한다. 화이불류에서도 불류, 즉 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속에 흐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마무리한다. 둘째, 현실 때문에 원칙을 어길 수밖에 없더라도, 이것이 옳지 않음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 토플 시험을 준비하며 기출문제를 공유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관 단체에서도 금지한 일이었고, 문제은행 방식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한 일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원칙을 어기더라도 최소한 이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한다. 셋째, 반복적이거나, “다들 하니까”라는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하지 않는 게 맞다. 원불교 공부를 시작한 한 분이, 농담 반 진담 반 “원불교 때문에 못 살겠어요” 하신다. 아마도 이런 상황들이 종교인이 되니 더 고민스럽다는 한탄인 듯하다. 누구도 쉬워서 진리적 삶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만큼의 보람과 가치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지난 명절 윷놀이로 딴 100달러까지 당장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수행이란 100% 완결된 삶의 모습이라기보다, 원칙을 존중하고 그에 다가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원칙 예비 성직자 기숙사 규정 원불교 공부
2025.12.15. 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