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김민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지난 7월21일이 1주기였다. 세월 참 덧없이 빠르다. 고인의 뜻이 워낙 완강했던 탓인지, 요란한 1주기 추모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다만 김민기가 20살 때인 1971년에 발매되었다가 판금 조치를 당해, 희귀본이 되었던 첫 음반을 54년 만에 복각하여 LP판으로 다시 냈다. 또 김민기를 존경하는 후배 음악인과 과거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입주해 인연을 맺었던 문인들이 공동 개최하는 ‘김민기 뒤풀이’ 공연이 열리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김민기의 예술정신과 인간성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조용하지만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공연계의 모판이었던 학전(學田) 소극장은 어린이 연극에 힘을 쏟았던 고인의 뜻을 살려 아동극 전용 ‘아르코 꿈밭극장’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학전김민기재단’을 올해 안에 설립하여 고인이 일생에 걸쳐 남긴 음악과 뮤지컬 작품과 작업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사업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뒷것’ 김민기답다. 하지만, 어쩐지 허전하고 아쉽다. 인간 김민기를 널리 알리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민기처럼 결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세상도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뒷것’ 정신에 대해서…. “‘뒷것’ 김민기 뒤에 장일순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장일순(張壹淳, 1928년-1994년) 선생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민주화운둥의 대부로 알려진 큰 어른이다.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 민중 속의 철학자로 김지하 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김지하 철학의 바탕인 생명사상은 장일순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랜 감옥살이로 생긴 정신의 상처를 먹그림 그리기로 치유하는 지혜를 가르친 분이기도 하다. 김민기는 김지하를 통해 장일순을 만난 이후에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마치 ‘아버지’처럼 따르며 모셨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난 김민기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늘 사무치게 그리운 자리였다. 장일순 선생 또한 민기를 지극히 아꼈고, 민기가 지은 노래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가사와 우리 정서를 담은 선율을 좋아했다. “그의 음악의 독창성이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에서 나오며, 공동체의 어울림을 가능하게 해준다”면서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늘 부르던 노래가 ‘아침 이슬’이었고, 술 한잔 걸치고 원주천 뚝방길을 걸어 집으로 갈 때도 아침 이슬을 부르면서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김민기가 군사정권의 엄혹한 감시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때 생산자인 농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구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1989년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혜성 등이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한살림모임’을 창립할 때 김민기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장일순 선생은 여러 가지 호를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무위당(无爲堂)’과 ‘좁쌀 한 알’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뒷전에서 할 일 다 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분의 주된 가르침은 “밑으로 기어라”였다. 앞에 나서서 떠들지 말고,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 김민기의 ‘뒷것’ 정신과 바로 이어진다. 장일순과 김민기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뒷것’으로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행복한 사람이었다. 장일순 선생의 말씀 한마디…. “사람이 보이는 것만 너무하면 재미가 없어. 안 보이는 가운데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 좋은 거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김민기 장일순 장일순 선생 김민기 뒤풀이 인간 김민기
2025.07.24. 19:29
1974년 당시 로스앤젤레스 시티칼리지(LACC)에 다니던 이민 초년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애환을 공유하며 그냥 ‘모임’으로 이름을 정했다. 올해 ‘모임’의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민 초년생에서 이제는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이미 우리 곁은 떠난 친구도 있고, 한국이나 타 지역으로 이주한 친구도 있다. 1978년 미주 한인사회 최초로 ‘모임’ 극회를 만들어 유랑극단이라는 연극을 올리기도 했다. 나는 창립 멤버는 아니다. 1974년 11월 이민 온 나는 그다음 해 5월 말 미군에 입대해 3년 동안 서독에서 복무를 마치고 1978년 5월 명예 제대를 했기 때문에 처음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제대 후 심심하던 차에 여름방학 기간 우연히 ‘모임’의 연극 연습 장소에 가게 되었다. 연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구경 삼아 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연출을 맡고 있던 김석만(전 한국종합예술원 교수)이 나를 지목하며 잠깐 나오라고 했다. “여기 한번 읽어봐.” 얼떨결에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된 순간이었다. 유랑극단은 이근삼 희곡으로 해방 전 신파 유랑극장 배우들의 다난한 삶을 통해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되물어 보는 작품이다. 당시 나는 이런 배경과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삭’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랑극단을 이끌던 오소공의 죽음으로 유랑극단을 이끌게 된 만삭과 세실이, 그러나 유랑극단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1979년 여름 장소현 작으로 ‘이철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에서 이철수 역을 맡게 된다. ‘이철수 사건’은 한인 이민사뿐 아니라 소수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이철수는 1972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 멤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런데 복역 중 백인 우월주의자인 한 수감자가 이철수를 살해하려다 몸싸움 과정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철수는 사형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인 언론계의 원로인 이경원 기자가 당시 이 사건에 의문을 갖고 파헤치면서 결국 진실이 밝혀져 이철수는 무죄로 석방됐다. 연극은 이런 내용을 다뤘다. 연극 수익금은 전액 이철수 구명 후원회에 전달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연극 배경음악으로 얼마 전 고인이 된 김민기의 노래들이 많이 쓰였다. 그렇게 ‘모임’ 극회와 김민기의 인연이 시작됐다. 김석만 교수와 김민기는 서울대학교 연우무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연극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고 배경 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모임’ 회원들은 1980년대 김민기가 시작한 신정 야학에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김민기를 딱 1번 만난 적이 있다. 대학로 학전에서 성황리에 공연되던 ‘지하철 1호선’을 김석만 교수와 함께 관람한 후 김민기와 인사를 나눈 것이다. 나는 1984년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아내와 함께 ‘상록수’를 불렀다. 그리고 김민기의 ‘친구’는 나의 애창곡 중 하나다. 김민기의 노래들은 1970~80년대 한국의 독재정권 시절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줬다. 특히 ‘아침이슬’은 대표적인 저항 가요로 불렸다. 김민기 전 학전 대표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모임’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한인 사회에서 50년간 지속하는 모임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고 다툼도 있었지만 다시 화해하고 우정을 나누고 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해 본다. 구본우, 제임스 김, 장사한, 박무영, 박준성, 백광호, 김영수, 노재유, 김교효, 강용석, 이광진, 김정석, 그리고 김석만. 그리운 이름들이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연구소 소장중앙시론 김민기 전액 이철수 한국종합예술원 교수 미주 한인사회
2024.08.05. 17:54
한국 소극장 문화의 상징인 ‘학전(學田)’이 창립 33주년을 맞는 3월15일까지만 운영하고 문을 닫는다는 소식, 지속적인 운영난에다 김민기 대표의 건강 문제가 겹쳤기 때문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많이 아프고 저리다. 한 시대의 문화 상징이 사라지고 소중한 정신적 가치가 스러지는 일이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김민기는 위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이라고 한다. 애국가 못지않게 널리 불리는 명곡 ‘아침이슬’로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전설이 된 김민기는 노래는 물론 뮤지컬, 연극 등 여러 방면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터넷 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민기(金敏基, 1951년~ )는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이며 극작가, 연극연출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이다’.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학전’은 배울 학(學)에 밭 전(田), 그러니까 배움터로 '못자리 농사를 짓는 곳' 즉, 모내기 할 모를 기르는 조그만 논, 나중에 크게 성장할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하는 곳이라고 김민기는 말했다. 그런 바람대로 많은 배우와 가수들이 학전에서 자라났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통하는 배우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를 비롯해 세계적인 재즈 가수 나윤선이나 윤도현도 이 무대를 거쳤다. 가수로는 동물원, 들국화, 강산에, 장필순, 박학기, 권진원, 유리상자, 노찾사 등 많은 예술가가 학전 소극장에서 공연하며 성장했다. 김광석은 199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꾸준히 공연을 펼쳐 1000회를 채웠다. 학전 앞에 세워진 김광석 노래비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꽃을 가져다 놓는다. 많은 기록도 세웠다. 소극장 뮤지컬의 대명사가 된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초연 이후 4275회나 공연되면서 73만명 이상이 관람하며, 한국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 작품은 한국 뮤지컬 최초로 라이브 연주로 공연되는 등 숱한 기록을 세웠고, 세계무대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김민기는 한 예술가의 고집스러운 철학과 신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해야 할 일, 필요한 일이라고 믿으면 돈이 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직스럽게 밀고 나간다. 이해타산을 따져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이런 소신을 그는 ‘바보 같고 미련스러워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웃는다. 이런 고집불통의 김민기를 모두가 존경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연극이다. 돈이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명감으로 공연을 계속했다. 따지고 보면, 학전 소극장을 마련하고, 극단 학전을 창단한 것부터가 그렇다. 계산했다면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김민기 대표는 재정난에 시달리며 자신의 음원, 저작권 수익까지 쏟아부어 학전을 꾸려왔다. 그렇게 예술적 신념을 미련하게 밀고 나가는 동안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학전’에서 자라난 배우와 가수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모두 김민기와 학전에 문화적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학전의 폐관을 안타까워하고, 김민기의 전설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뭉쳐서 마지막 공연 ‘학전 어게인’을 마련했다고 한다. 널리 번져가는 안타까움과 정성이 전해졌는지, 나라에서 지원을 약속했고, 그 덕에 폐관은 간신히 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단은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다. 하지만,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살린다고 해서, 한 예술가의 투철하고 아름다운 정신까지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민기와 학전의 전설은 한 시대의 굵직한 이정표 같은 것이다. 김민기라는 한 예술가의 아름다운 정신과 가치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모두의 바람대로 병상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빛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예술정신 김민기 김민기 대표 학전 소극장 소극장 뮤지컬
2024.02.08.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