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사는 단순한 정착의 기록이 아니라, 제도적 장벽과 사회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던 환경 속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인 2세로 태어나 미 육군 대령까지 올랐고, 전역 이후에도 한인 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던 김영옥(Young Oak Kim·1919~2005) 대령의 생애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김영옥 대령은 1919년 1월 29일 LA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아버지 김순권은 미주에서 대한인동지회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조국이 외교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부터 두 사회의 경계에 놓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은 고용과 주거, 일상 전반에서 제도와 관행으로 작동했고, ‘이중 정체성’은 자산이라기보다 부담에 가까웠다. 그는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LA커뮤니티칼리지(LACC)에 진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안정적인 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1941년 미 육군 입대는 개인적 진로 선택이자, 당시 아시아계가 제한적으로나마 사회적 이동을 시도할 수 있었던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그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의 육군 장교후보생학교를 수료하고 1943년 소위로 임관했다. 배치된 부대는 일본계 2세 중심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보병대대였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계 미국인들이 집단 수용과 감시의 대상이 되던 시기, 이 부대는 군사적 필요와 인종 정책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한국계 장교가 일본계 병사들을 지휘하는 구조는 내부 갈등의 소지가 컸지만, 김영옥 대령은 전투 수행 능력과 현장 지휘를 통해 신뢰를 쌓아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3년 말부터 그는 미 제5군 소속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됐다. 볼투르노강 전투를 비롯해 독일군의 주요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 돌파 과정에서 정찰, 돌파, 정보 확보 등 고위험 임무를 수행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44년 5월 독일군 전차부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적진에 침투해 독일군 포로를 생포하고 전술 정보를 확보한 작전은 이후 연합군의 로마 해방 작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례로 언급된다. 전공은 전투 성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최소 병력으로 정보를 확보하고 작전의 변수를 줄이는 방식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려는 지휘’로 이어지며 자주 회자된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미국의 은성무공훈장과 수훈십자장을 받았고, 이탈리아의 십자무공훈장,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 등 각국 최고 수준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한국·미국·유럽에서 동시에 무공을 인정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군 경력은 이례적이다. 1945년 종전 후 그는 대위 계급으로 전역해 LA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민간인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군에 복귀했다. 1951년 예비역 소집 방식으로 재입대한 그는 한국으로 향했다. 이때가 그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개인적 연고나 현실적 이익보다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역할을 전장으로 한정한 결정이었다. 한국전에서 그는 미 제7사단 31연대 정보장교로 배속돼 중부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해 보병대대장에 임명됐으며,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대대장 사례로 기록된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 속에서 그는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전선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이 38선 인근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그는 같은 해 철의 삼각지대 전투 도중 아군 오폭으로 중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됐다가, 치료 후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의 활동은 전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전 당시 그는 전쟁고아 지원에 깊이 관여했다. 장병들의 성금을 모아 고아원을 지원하고, 직접 보호 활동에 나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투 현장에서의 판단과 전후 상황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작동한 사례로 평가된다. 일부 무공훈장 수여를 부하들에게 돌리려 했다는 일화 역시 이러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1972년 대령으로 전역한 이후 김영옥은 정치권 진출이나 군 관련 직위 대신 지역사회 활동에 집중했다. 그는 LA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여러 비영리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에 관여했다. 한인 건강·복지 분야에서는 한인건강정보센터 설립에 참여했고, 정치·시민권 영역에서는 한미연합회 창립에 기여했다. 문화·역사 분야에서는 한미박물관 창립 이사와 이사장을 맡았다. 이 밖에도 일본계 미군 참전용사 단체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 재단 활동, 가정폭력 피해 아시아계 여성과 자녀를 위한 보호시설인 ‘센터 포 퍼시픽 아시안 패밀리(Center for Pacific Asian Families)’ 지원에도 관여했다.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나는 100% 한국인이자 100% 미국인이다”라는 표현은 자주 인용된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감상적 선언이라기보다, 두 사회에 동시에 책임을 진다는 태도에 가깝다. 전장에서는 미국 군인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전쟁 이후에는 한인 공동체의 문제를 다뤘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두 역할을 병렬적으로 수행한 삶이었다. 김영옥 대령의 이름은 현재도 여러 공공시설과 교육기관을 통해 남아 있다. LA의 공립 중학교 ‘영옥 김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딴 대표적 사례다. ━ ☞김영옥 대령은… 1919년 1월 29일 LA에서 태어나 2005년 12월 29일 별세했다.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로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포트 베닝 장교후보생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으며, 일본계 2세 중심의 100보병대대 소속으로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서 전공을 세웠다. 한국전에서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대대장을 지냈고,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해 1972년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설립에 관여했다. 강한길 기자미국 김영옥 김영옥 대령 육군 대령 대한인동지회 활동
2025.12.31. 19:41
고 김영옥 대령이 ‘제1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수상했다. ‘한미동맹상’은 한국 국방부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상으로 한미 관계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에게 주어진다. 국방부는 “고 김영옥 대령이 보여준 뛰어난 용맹과 애국심, 인간애는 양국 국민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미동맹상’은 10년 전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첫 수상자인 6·25 전쟁 영웅 고 월튼 워커 예비역 대장을 비롯해 지난해 댄 설리번 연방상원의원까지 역대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권위가 있는 상이다. 고 김영옥 대령은 첫 한인 수상자라 의미가 크다. 따라서 이번 수상은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LA에서 출생한 고 김영옥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일본계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리더십을 인정받았고, 6·25 발발 소식이 들리자 자진 재입대 참전했다. 이런 공로로 미국에서 수훈십자장,은성무공훈장 등을 한국에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미주 한인 사회의 영웅이기도 하다. 한인 사회의 명예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등 비영리 단체들을 설립해 한인 권익 향상에도 기여했다. 그의 이런 헌신은 한인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LA한인타운에 김영옥 중학교가 생기고, UC리버사이드에 김영옥 연구소가 설립된 것도 이런 그의 공로를 기억하고 차세대에게 전하기 위함이다. 지난 5월에는 미 육군 명예의 전당에 헌액돼 미 육군의 역사를 빛낸 위대한 군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현재 연방의회에는 그에게 연방의회 금메달을 수여하자는 법안이 상정되어 있다. 한인 연방 의원들이 중심이 돼 추진하는 것이다.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한인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사설 한미동맹상 김영옥 김영옥 대령 백선엽 한미동맹상 김영옥 중학교
2023.11.15. 18:58
지난 5월 16일 필자는 캔자스시티의 포트 레번워스(Fort Leavenworth)에서 열린 고 김영옥 대령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다녀왔다. 미 육군의 공식 초청을 받은 자리였다. 이에 앞서 김 대령은 지난 4월 그가 장교 훈련을 받았던 조지아주 포트 무어(Fort Moore)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명예의 전당은 특정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존경받는 인물을 기념하는 곳이다. 김 대령이 두 곳의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인사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고 김영옥 대령’은 더 친숙한 이름이 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부에나파크 근처의 5번 프리웨이 구간을 ‘김영옥 메모리얼 하이웨이’로 명명했고, 평택의 미군 기지내 예비군 훈련 빌딩도 ‘김영옥 빌딩’이 됐다. 2009년 LA통합교육구는 한인타운 6가와 버몬트에 신설된 중학교를 ‘김영옥 중학교’로 명명하기도 했다. 필자는 2010년 UC 리버사이드에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를 정식 개소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강제노역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위해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정에 제출할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USC에서 연구 기금을 신청키로 했는데 친일 교수들의 방해로 무산이 됐다고 한다. 그때 김 대령이 필자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관계자들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필자가 앞장서 기금 신청을 했고 이때 장기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소 설립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캔자스시티 공항에 도착하니 포트 레번워스 관계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헌액식은 다음날 ‘루이스 앤 클라크 센터’라는 곳에서 성대하게 진행됐다. 행사는 포트 레번워스의 사령관인 밀포드 H. 비클 주니어 중장이 직접 주관했다. 비글 중장은 흑인이다. 아마 그가 흑인이기에 김영옥 대령이 아시아계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행사장엔 군인과 가족 약 100여명으로 꽉찼다. 비글 사령관의 인사말과 함께 헌액식이 시작됐다. 사회자가 김 대령의 업적과 일생을 소개했다. 이어 필자의 5분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준비했던 내용은 이미 비글 사령관과 사회자가 다 소개한 터라 즉흥 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필자의 미군 경험담으로 시작했다. 예전에는 위생병 Medic이 91B이었는데 지금은 68W로 바뀐 걸 구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참석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1979년 김 대령과의 첫 만남, 그리고 그의 임종 2일 전 병실 방문 얘기를 들려줬다. 이어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책 출판과 영문 번역 관련 내용, 김 대령이 은퇴후 평생을 약자와 소수계, 그리고 한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포트 레번워스’는 단순한 미군 기지가 아니라 미 육군의 중요한 교육시설(Army Intellectual Center)이다. 특히 매년 소령으로 진급하는 1100명이 이곳에서 11개월 동안 재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미군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곳인 셈이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장교들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김 대령이 헌액된 장소에서 미군의 한인 소령, 한국군 소령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헌액 작업을 주도한 피터 임 교관은 필자가 번역한 ‘Unsung Hero: Col. Young Oak Kim Story’를 읽고 김영옥 대령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그의 노력 덕에 김 대령의 헌액이 가능했다. 필자는 1978년 5월 미군 제대 후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닐 때 ‘United Way’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김 대령을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1990년대 말에서야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더 유명했다. 그는 일미박물관 건립을 주도했고 바로 옆에 세워진 ‘Go For Broke Monument’ 건립도 주도했다. 또한 일본계 미국인 재향군인회인 ‘Go For Broke Educational Foundation’ 회장을 역임했다. 일본계 미군 전역자들이 김 대령을 리더로 인정하고 따른 것이다. 포트 레번워스의 명예의 전당은 미군의 전설인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있는 곳이다. 한인사회의 자랑인 고 김영옥 대령을 2세들에게 더 많이 알려야 한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김영옥 명예 김영옥 대령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김영옥 중학교
2023.07.09. 18:00
고 김영옥 대령(1919∼2005)이 한인 최초로 미 육군 장교 교육기관인 육군 지휘참모대학(CGS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운데 〈본지 5월 19일 자 A-1면〉, LA시 공공도서관(LAPL)도 아태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김 대령을 조명하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3권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LAPL은 소식을 전하는 블로그에 김 대령을 “1919년 LA에서 태어났으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한국계 미 육군 장교이자 시민 지도자이며 인도주의자였다”고 소개하고 그의 활동과 업적을 성장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아시안 커뮤니티에 대한 헌신까지 4개 섹션으로 나눠 자세히 설명했다. 먼저 김 대령이 대단한 애국심을 갖고 성장했으며 당시 미군이 아시아계의 입대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군대에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정된 법에 따라 1941년 1월 육군에 입대한 최초의 징집번호를 가진 군인이 됐다고 소개했다. 특히 김 대령이 1948년과 1952년 올림픽에서 다이빙 금메달을 딴 최초의 아시안이자 한인 커뮤니티의 또 다른 전설인 새미 리 박사와도 친구였다고 알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운영하던 세탁소를 팔고 다시 한번 한국에서 싸우기 위해 미군에 입대했으며, 미군에서 전투 대대를 지휘하는 최초의 아시안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이후 김 대령이 퇴역한 후 아시안 커뮤니티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현 이웃케어의 전신인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인박물관, 한인타운청소년센터의 전신인 한인청소년문화센터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계 커뮤니티를 도와 일미박물관 설립을 도왔으며 마이크 혼다 전 연방의원이 상정해 제정된 위안부 결의안을 강력히 지지한 리더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밖에 2009년 한인타운에 김영옥중학교가 개교했으며, 2010년 UC리버사이드에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가 설립돼 이름을 빛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LAPL는 김 대령의 일대기가 담긴 책으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장태한 소장이 번역한 ‘이름 없는 영웅: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 데릭 밀러의 ‘한국전쟁에서 싸운 소수계 군인들(Minority Soldiers Fighting in the Korean War)', 테어도어 준 유의 '한국: 분단된 두 나라의 탄생(The Koreas: The Birth of Two Nations Divided)'을 추천했다. 자세한 내용은 도서관 웹사이트(www.lapl.org/collections-resources/blogs/lapl/spotlight-young-oak-kim)에서 찾을 수 있다.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도서관 김영옥 김영옥 대령 la도서관 김영옥 세계대전 한국전쟁
2023.05.18. 21:42
고 김영옥 대령(1919∼2005)이 한인 최초로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육군 장교 교육기관 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 있는 포트 레번워스 ‘육군 지휘참모대학(CGSC)’은 16일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포트 루이스앤클라크센터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영웅으로 추앙받는 고 김영옥 대령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고 밝혔다. CGSC에 따르면 육군연합병과센터와 포트 레번워스의 사령관 밀포드 비글 주니어 중장이 헌액식을 직접 주최했으며, 한인 장교 10여명을 포함해 100여명이 넘는 고위 장교들이 참석해 행사를 끝까지 지켜봤다. 비글 주니어 중장은 이날 고 김 대령에게 세계대전 군 사령부의 명예 증서도 수여했다. 김 대령의 자서전 ‘이름 없는 영웅 김영옥 대령’의 번역가로 초청받아 이날 헌액식에 참석한 장태한 박사는 참석자들에게 김영옥 대령을 영상과 함께 소개하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 박사는 “미국의 유명한 영웅들이 있는 명예의 전당에 김영옥 대령의 이름이 올라간 건 역사적인 사건이자 미주 한인들의 자랑”이라며 “무엇보다 한인 2세들 중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나 ROTC(학생군사교육단) 출신 장교들이 많은데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CGSC는 향후 김 대령의 이야기를 교과 과정에 다루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LA에서 태어난 김 대령은 미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뛰어난 무공을 세워 미국 정부로부터 특별·은성·동성 무공훈장을 받았고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무공훈장, 한국 태극무공훈장도 수훈한 전쟁 영웅이다. 2차대전 참전 후 예편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해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참모를 거쳐 미군 역사상 유색인종 가운데 처음으로 전투대대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고아 500여 명을 돌보며 인도주의를 보여주기도 했다. 1972년 전역한 후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가정폭력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한인 입양아 등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쳤다. 2005년 12월 LA에서 별세한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LA한인커뮤니티는 6가와 버몬트 애비뉴 인근의 중학교에 그의 이름을 딴 ‘김영옥 아카데미’로 명명해 김 대령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 육군 지휘참모대학은 미군 고위 지휘관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1881년에 설립돼 1883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뒤 수많은 장교를 재교육했다. 장군을 꿈꾸는 장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엘리트 코스로, 소령급 이상이 짧게는 수주에서 길게는 2년 동안 지휘관이 반드시 갖춰야 할 리더십과 전술 등을 교육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마셜 장관, 더글러스 맥아더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이곳을 졸업했다.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김영옥 김영옥 대령 전쟁영웅 김영옥 육군 지휘참모학교
2023.05.17. 20:57
고 김영옥 대령 ‘연방하원 골드 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 추서가 다시 추진된다. 미셸 박 스틸, 영김, 메릴린 스트릭랜드, 앤디 김 등 한인 연방하원의원 4인방은 지난달 30일 관련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의원들은 “김 대령의 결단과 용기는 모든 미국인의 귀감”이라며 초당적 발의 이유를 밝혔다. ‘연방하원 골드 메달’은 연방의회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이다. 한인 연방의원들은 지난 2021년에도 골드 메달 추서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당시 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져 지원에 나섰지만 아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 김영옥 대령은 한인사회의 영웅이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LA에서 태어난 그는 미군 장교로 세계 2차대전과 6·25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에서는 최고 무공훈장을, 미국에서는 십자훈장 등을 받았다. 아시아계 최초의 미군 전투부대 대대장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한인사회에도 그의 업적은 남아있다. 그는 전역 후 많은 한인 비영리단체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인건강정보센터,코리아타운청소년센터, 한미연합회 등이 그가 설립에 참여한 단체들이다. 이런 업적으로 지난 2009년 LA한인타운에 문을 연 중학교의 이름이 ‘김영옥 아카데미’로 명명되기도 했다. 고 김영옥 대령은 한인사회에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의 리더십과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은 차세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고 김영옥 대령 골드 메달’ 추서 법안 통과에 한인사회의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위해 추진위원회의 재가동도 필요하지만 한인들이 지역구 연방 의원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지지를 호소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인 이민역사 120년을 맞았지만 ‘한인 영웅’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 작업은 부진했다. 이런 의미에서 고 김영옥 대령 골드 메달 추서 추진 작업은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설 골프 김영옥 김영옥 대령 메달 추서 추서 의미
2023.02.01. 18:12
‘전쟁 영웅’ 고 김영옥 대령에게 연방하원 골드 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을 추서하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30일 연방하원에 따르면 한인 연방하원의원 4인은 초당적 협의를 통해 김 대령에게 골드 메달을 추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연방의회 골드 메달은 의회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이다. 미셸 박 스틸 의원(공화 가주 45지구)은 “김 대령의 결단과 용기는 모든 미국인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그에게 메달을 수여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영 김(공화 가주 40지구), 앤디 김(민주 뉴저지 3지구), 매릴린 스트릭랜드(민주 워싱턴 10지구) 의원도 뜻을 같이해 공동 발의에 나섰다. 한인 의원 4인은 2021년 3월에도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5명 의원의 추가 지지 서명을 받았지만 끝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국계 미국인 하원의원으로서 우리가 김 대령의 모범적인 유산을 기리고 고양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는 군사적 영웅인 동시에 확고한 지역사회의 리더이자 인도주의자로서 이 높은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역 후에도 다양한 활동으로 한인과 아시안 커뮤니티의 모범이 됐다. LA한인타운 6가와 버몬트 애비뉴 인근의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영옥 아카데미’로 명명해 김 대령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미국에서는 수훈십자훈장을 받은 바 있다. 그는 86세였던 2005년 방광암 투병 중에 별세했다. 연방하원 골드 메달은 1776년에 시작된 후 매년 국가적 영웅에게 수여했는데 초창기에는 조지 워싱턴(첫 수상) 등 주로 전쟁 공훈에 대한 인물이 많았으나 1860년대 이후 개척자, 발명가, 외교관,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이들에게 돌아갔다. 지난해에는 1979년 이란에 인질로 잡혔던 피해자들이 수상했고, 올해 1월 5일에는 50년대 민권운동가인 에멧 킬과 매이미 틸 모빌리가 수상했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연방한인의원 김영옥 연방한인의원들 김영옥 김영옥 대령 김영옥 아카데미
2023.01.30.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