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침에] 샐러드 볼을 바라보면서
점심으로 샐러드 보울을 준비했다. 초록, 빨강, 보라 등 다양한 색의 채소로 생기 넘치는 모양이 꼭 남가주 봄 풍경이다. 샐러드를 먹으려던 찰라, 소셜미디어(SNS) 메시지 하나에 평온함이 산산이 조각났다. ‘한 나라의 문명이 사라질 것’이라는 미국 지도자의 섬뜩한 경고였다. 지난해 봄 시작된 불법 이민자 단속으로 남가주도 두려움에 떨었다. 무장하고 복면까지 쓴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이곳저곳을 급습했기 때문이다. 특히 LA 다운타운 지역의 단속이 심해 직장과 거주지가 그곳인 아들이 공연히 피해를 보지나 않을까 봐 가슴 졸이기도 했다. 전쟁터 같은 급습 장면을 보며 내가 사는 미국에 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과테말라 마야인 초토화 작전 등 많은 비극적 역사 곁에도 있었다. 이후 많은 난민과 망명자가 미국으로 몰렸고 그중 많은 이들이 가주에 자리를 잡았다. 남가주에는 130여 개국 출신 이민자와 224개 언어가 공존하고, 한인타운 등 15개 이상의 소수민족 타운이 형성돼 있다고 한다. 웨스트 LA의 테헤란젤레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고국을 떠난 망명객들이 터를 잡으며 형성된 이란 커뮤니티다. 이국적인 찻집, 고풍스러운 카페가 늘어선 거리를 기웃거리는 동안 ‘아라비안나이트’의 마법 양탄자를 상상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나누며 땀으로 일궈낸 아름다운 남가주 풍경이다.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전하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이에 대해 변화를 위한 결단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원칙 없는 파격이 초래할 혼란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민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자세를 낮추는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남가주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터전이다. 이제는 내 국적이 된 나라인 미국의 힘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듯해 서글프다. 발만 동동 구르기보다 할 수 있는 만큼 반 발짝만이라도 내디뎌 보기로 했다. ‘노 킹스 데이(No King’s Day) ‘집회에 참석한다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다나 포인트를 지나는 해안도로로 나갔다. 1마일은 족히 될 듯한 거리의 양쪽 보도는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미국에 왕은 없다’ ‘내 이웃을 잡아가지 말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어 보였다. 한 히스패닉 남자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며 ‘파워 투 브라운(Power to Brown)’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운전자들은 경적을 두 번씩 반복해 울리며 동참 의사를 알렸다. 오늘도 남가주에서는 불법 이민자 체포를 명분으로 여기저기서 급습 작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란 전쟁의 소용돌이에 묻혀있는 듯하다. 다문화의 상징인 남가주가 대통령의 서슬 퍼런 정책에 시들어 버릴까 걱정이다. 샐러드 보울 채소처럼 남가주 빛깔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텐데, 마음이 무겁다. 이정숙 수필가이아침에 샐러드 샐러드 보울 남가주 빛깔 불법 이민자
2026.04.27.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