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당] 행복이 뭐 별거냐
                                    올가을은 유난히도 길었다. 나뭇잎은 계절을 잊은 듯 여전히 초록색을 띠며 떨어질 생각이 없다.     센트럴파크를 걷다가 갑자기 설사가 나오려고 했다. 티제이 맥스에 들어가 화장실로 뛰었다. 남자 소변보는 용기를 본 것도 같은데 급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지 그냥 들어갔다. 변을 봤다. 휴지통에 휴지가 없다. 내 주머니에도 없다. 와! 어떡하지.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는데 바로 옆 칸에서 인기척이 났다. 밑 뚫린 곳을 보니 남자 구두가 보였다. 아이고, 내가 남자 화장실에 앉아 휴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급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뻔뻔해진다더니.     “죄송한데요. 여기 휴지가 없어요. 휴지 좀 건네줄 수 있을까요?”   조용히 화장실 밑으로 한 움큼의 휴지를 받았다. 내 사정을 훤히 안다는 듯 또다시 한 뭉치의 휴지를 건네줬다.     “대단히 고마워요. 혹시 제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왔나요?”     굵직한 소리가 말했다.   “네, 여자 화장실은 입구 오른쪽에 있었는데 지나쳤군요.”   “너무 급해서 보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그 남자가 나오기 전, 후다닥 일어나 뒷정리를 위해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변이 급할 때마다 자동으로 닥터 지바고 영화가 떠오른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태운 영화의 기차 안 풍경을 떠올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대변이 급하면 어찌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닥터 지바고에서는 기차에서 생긴 오물을 버리기 위해 문을 여니 문 크기의 얼음판으로 막혀있다. 삽으로 얼음을 후려쳐서 깨고 볏짚 더미에 엉긴 오물을 문밖으로 쓸어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변기에 앉아 변을 볼 수 있다는 크나큰 행복에 빠졌다.   고차원적인 삶이 굳이 아니더라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행복하다.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 옆 화장실에 앉아 있던 점잖은 남자에게 감사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행복 별거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남자 구두 
                                    2025.10.30.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