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화(民畵)에 대한 인기가 미주에서도 높아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른바 K-아트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적 아름다움을 듬뿍 담은 민화에 대한 사랑도 커지는 것 같다. 민화를 지금 상승세를 타고 있는 미술 한류의 강력한 경쟁력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도 많다. 그런 인기의 영향으로, 민화 그리기를 배우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고, 의미 있는 전시회도 자주 열리고 있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한국 채색화 특별전, 데스칸소 가든의 한국의 화조도(花鳥圖) 전시에서 민화가 중심적 눈길을 끌었고, 지금 LA 한국문화원에서도 민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더 큰 인기라고 한다. “오늘날 민화 인구의 급증은 특이 사항이지 않을 수 없다. 전국에 산재한 수십만 명의 민화 인구는 채색화를 다시 주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계 일반에서 민화 붐처럼 활기를 띠고 있는 분야가 어디에 또 있을까. 세속 유행어로 인사동 대관화랑과 표구점, 그리고 미술재료상은 민화 인구가 먹여 살린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양적 팽창은 이제 질적 향상을 위해 심각하게 자성할 때이다.” -윤범모 ‘현대미술관장의 수첩’에서 민화가 인기인 까닭은 현세적 염원을 담은 그림의 내용과 생동감 넘치는 색채가 어우러진 조형적 매력 때문이다. 민화에 대한 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민화는 한 민족이나 개인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한 대중적인 실용화이다. 일반적으로 민속에 얽힌 관습적인 그림이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사회의 요구에 따라 같은 주제를 되풀이하여 그린 생활화를 말한다. 대체로 비전문가의 작품이지만 직업 화가가 그린 것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민화’라는 용어는 진지한 논쟁의 대상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을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다. 그는 민예(民藝)라는 용어도 만들었다. 야나기는 엄혹한 일제강점기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를 높게 평가하고 찬양한 고마운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사실은 한국미의 특징을 ‘비애의 미’로 규정하는 등 식민지 통치 정책에 동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민화를 우리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조형적으로 표현된 진정한 의미의 민족화로 보는 학자들은 민화라는 명칭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윤범모 전 한국현대미술관 관장은 이렇게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야나기의 민화론을 극복해야 한다. 단언하건대, 한국 민화가 살려면 야나기를 처리해야 새로운 활로가 생길 것이다.” 민화라는 용어를 쫓아내고, 꼭 알맞은 낱말을 찾아내 사용하자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있었다. 그동안 겨레그림, 채색 길상화, 한화(韓畵), 민족화 등 많은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민화’라는 낱말이 공식용어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제로부터 광복된 지 80년 세월이 지나도록 정신적으로는 일제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문화예술 쪽도 여전히 쓰레기투성이다. 가까운 예로 ‘미술’이라는 낱말도 일본 사람들이 급조해 낸 용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 중 한문 투 낱말의 70-80%가일본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저 우리말인 줄로 알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게 무슨 문제냐, 그래도 나라가 잘만 돌아간다, 일본을 넘어선 지 벌써 오래다…. 이런 식으로 눙치고 넘어갈 일이 결코 아니다. 나의 주체성을 바로 세우지 않고는 우리 문화 예술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없다. 내가 없는 한류는 일시적인 물거품으로 끝나기 쉽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민화 낱말 민화가 인기인 한국 민화 민화가 중심적
2024.08.15. 20:27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친구 부부를 오랜만에 만났다. 식당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친구 부인은 우리를 빤히 쳐다만 볼뿐 표정이 없다. 친구는 아내가 ‘착한 치매’를 앓고 있으니 양해하라고 했다. 점심을 마치고 친구가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서니 부인도 따라나섰다. 친구는 아내가 남자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가려 하니 내 아내에게 함께 여자 화장실에 다녀와 달라고 부탁했다. 말로만 듣던 치매 증상을 직접 목격하니 충격이 컸다. 앞으로 우리 집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오래전 ‘나쁜 치매’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남편이 매일 요양원을 방문해 아내를 만나지만 아내는 남편을 못 알아본다. 물론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해 혼자 요양원 밖으로의 외출은 불가능했다. 갓난아기보다 더 많은 돌 봄의 손길이 필요했다. 나도 요즘 현저히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집 근처 노상 지나다니는 길 이름도, 인근 도시 이름도 생각이 나질 않아 구글 지도를 찾아보기도 한다. 이러다가 아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까 봐 ‘여보’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화하는 뇌세포를 운동시켜 기억력을 증진하는 방법을 찾다가 신문에 게재되는 ‘낱말퀴즈’를 풀기 시작했다. 빈칸을 채우면서 마음에 찔리는 게 있었다. 오래전 맥도날드의 구석 자리에서 시니어 한 분이 신문을 펼치고 ‘크로스워드’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분이 ‘킬링타임’을 한다며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같은 것을 하고 있다. 그분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낱말퀴즈는 수수께끼처럼 물어봐서 재미가 있다. 가령 ‘몹시 변덕스럽고 꾀가 많은 여자는?’ 하고 묻는다. 잘 몰라 답을 보니 ‘불여우’라고 해서 한참 웃었다. 아내에게도 낱말퀴즈를 물어보면서 잘 모르면 첫 자를 알려주거나 몇 자라고 힌트를 준다. 요즘 아내는 유튜브에 나오는 사자성어 낱말 퀴즈를 즐겨한다. 작년 여름 여행 때 비행기 옆 좌석에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앉았었다. 그녀는 한 시간 내내 스도쿠(Sudoku:숫자퀴즈) 책자를 보면서 열심히 1-9까지의 숫자를 써넣고 있었다. 마치 간첩들이 쓴다는 난수표 같은 암호풀이 같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 회계 분야에서 일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녀는 디자인 일을 한다고 했다. 내가 스도쿠를 신기해하니 한장 찢어 주며 해보라고 했다. 10여 분을 이리저리 시도하다 결국 못 하겠다고 하니 그녀가 웃었다. 그러면서 본인은 10대 시설부터 식구들과 함께 스도쿠를 했다고 말했다. 고령사회인 일본은 고령자 5명 중 1명이 치매 환자로 그 숫자가 67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치매가 ‘어리석고 아둔하다’는 뜻이라고 해서 일본에선 이 말 대신 ‘인지증’이라고 표현한다. 한국도 치매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자연히 치매 환자도 늘고 있다. 육체 운동처럼 뇌세포 운동도 필요하다. 재미있게 치매 예방을 할 수 있는 낱말퀴즈를 권하고 싶다. 윤덕환 / 수필가열린광장 치매 낱말 치매 환자 낱말 퀴즈 치매 증상
2024.04.08. 19:05
먼 나라 어느 도시에 가 있는 현지 기자들이 전하는 소식은 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산 너머에 혹은 바다 건너 도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서 좋고 그 도시의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고 여기는 이런데 거기는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알게 하는 기자의 언어가 재미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도시 통신’이라는 같은 이름의 기사가 어제와 오늘이 또 다른 분위기를 전하고 있어 이름도 나이를 먹나 철이 들어가나 혹은 늙어가기도 하는가 생각하게 된다. 50년 전 뉴욕통신의 기사와 오늘의 뉴욕통신 기자가 전하는 말은 지나간 시간의 부피만큼 달라진 얼굴을 내보이고 있다. 첫 여름 같았던 오래전 어느 시절에 말해지던 편지라는 낱말은 제법 운치가 있었고 가슴이 달달해지는 애틋함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름이 가고 뒤에 젊은이들의 여름이 푸른 잎을 살랑거리고, 그때의 하얀 손수건이 손안에 기적 같은 전화기로 바뀌어버린 오늘은 손편지의 정성 같은 것에 겨우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애틋함이나 운치는 이미 너무 느린 속도감으로 눈길을 끌지 못하고 3초를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심은 연애편지를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편지라는 낱말이 그렇게 얼굴을 바꾸고 빨라지는 문화 옆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의 영화를 화제로 꺼내면 다른 세대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영화를 떠올린다. 화려한 파티의 풍경도 색깔을 달리한다. 첫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내의 얼굴도 상당히 정직하고 속 깊은 순정남에서 약간 피부적인 욕망의 사내 얼굴로 바뀌어 있다. 개츠비라는 낱말이 세월을 타고 와 얼굴을 바꾸고 우리 앞에 등장한다. 자기의 영화를 떠올렸던 사람들은 산 너머 가버린 혹은 옛날로 흘러가 버린 낯익은 화면을 아쉬워한다. 변해버린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버린 자기의 시간을 실어 내는 달라진 낱말의 낯선 얼굴을 슬퍼한다. 살던 나라를 떠나 오랜 시간 다른 나라에서 살아낸 사람들은 자기가 쓰는 모국어 언어가 얼굴을 바꾸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떠나온 나라에서는 그 오랜 시간을 지내는 동안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때그때 맞추어 성장하고 바꾸고 늙고 또는 아주 죽어버린 언어가 되어 달라진 얼굴을 내밀며 거리를 흘러가지만 그 거리에 함께하지 못한 떠나온 자들은 박제가 되어버린 언어를 붙들고 똑같은 얼굴의 낱말을 소중하게 아끼고 있다. 문득 어느 날 모국어의 많은 것이 낯선 언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발전된 통신기술이 있어 가서 살지 않아도 떨어져 살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 만큼 가깝게 하고 있지만 여전히 현장이 다른 삶으로는 얼굴 바꾼 낱말이 서먹하다. 붓으로 한가롭게 써내려던 사랑이나 전쟁 전에 불안정한 삶의 사이사이에 끌어내던 사랑이나 전쟁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세운 도덕 속에 피워내던 사랑이나 상처를 잊고 풍요를 이루어낸 고속도로 위에 펼쳐내던 사랑이나 비록 얼굴이 이만큼씩 달라져 있을지라도 그 안쪽에 깊이 품어져 있는 사랑이라는 원래의 따뜻한 속살은 변함이 없다. 한 세대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으로 느끼던 세대 차이를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조차 먼저와 나중이 느끼게 되었다고 웃으며 말할 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의 세상은 너무나 많은 낱말의 얼굴을 제 마음대로 바꾸어 놓고 있다. 가면을 갈아 쓰듯 변하는 겉 얼굴을 좇아가려고 숨 가빠하기 보다는속 얼굴 속살을 잃어버리지 않고 낱말의 제모습을 지키는 지혜로 잘 보듬어주고 싶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얼굴 낱말 사내 얼굴 얼굴 속살 모국어 언어
2022.06.13. 17:25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낱말이 가득하다. 그것들을 하나씩 만나면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생각과 사건과 영상 등을 대면한다. 단어 하나에 읽는 사람의 숫자만큼 많은 사연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만나고 헤어지며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아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되고 즐거움도 되고 무서워하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그 마을의 전설을 품고 그 나라의 역사를 품는다. 하나의 낱말은 하늘을 갖기도 하고 강물의 흐름을 담기도 하고 들판의 곡식을 들어내기도 하고 숲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로 들려지기도 한다. 세상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엮이고 엮여서 우리 사이에, 우리 눈앞에서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워내는 씨앗이 된다. 비 갠 아침 같은 상쾌함을 전하는 말이 있고 우울함을 전하는 말이 있다. 어떤 말은 만나고 싶고 어떤 말은 만나기 싫은 것이 있다. “그 말은 나에게 행복감을 주고 있어”라는 것이 있고 혹은 “그 말이 나에게 상처를 일깨워 주네”라는 것이 있다. 어감이라고 표현되는 언어가 주는 분위기를 매일 느끼며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어낸다. 누구에게나 편안함과 고향 공기 같은 ‘어머니’라는 말이 있고 참으로 많은 그리움의 영상을 선사하는 ‘첫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련하게 가진 ‘고향’이라는 말은 고산준령 산맥 위를 맴돌기도 하고 곡식 익는 넓은 들판을 펼쳐내기도 하고 갈매기 오락가락하는 바닷가 파도 소리를 되살리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갈 수 없는 곳을 향한 한 맺힌 소원이기도 하고 복잡한 도심의 큰 건물 가득한 거리를 떠올리게도 한다. 똑같은 낱말이 만나는 각 사람의 여정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으로 이야기를 끌어내고 각 사람의 감정을 만지고 있다. 가끔 글쓰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 무엇을 쓸까 하며 글감 찾기에 골몰하며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 속에 또 많은 이야기를 가진 수많은 낱말을 앞에 두고도 찾아내지 못하고 어려워한다. ‘마술학교’라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것 같은 단어에서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어 엄청난 이야기책을 엮어낸 평범했던 아이 엄마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 많이 실리는 낱말 찾기를 풀어가다 보면 무심히 쓰던 어떤 말이 “아! 이 낱말이 이런 뜻이었고 이런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놀랄 때가 있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은 새삼스럽게 다가오고 머리에 새겨지고 또 더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재미있는 말이 되어 마음에 남는다. 평범했던 말이 어느 특별한 사람에 의해 특별한 말이 된다. 평범치 않은 말이 되어 이야기를 탄생시키고 우리 삶에 윤택함을 더한다. ‘빗소리’라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 말도 어떤 자리에 보기 좋게 놓아둠으로 각별한 감성을 끌어내는 어감 좋은 말로 탈바꿈하게 하는 작가의 노력은 그래서 값진 것이 된다. 평범했던 어떤 이름이 분홍빛 이야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기도 한다. 추억의 어떤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유로 그저 지나쳐가는 사람이 다른 인연의 별다른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나에게 좋은 느낌을 주면 그것은 좋은 결과이다. 자기의 이름이 타인에게 어떤 느낌으로 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방송불가’ 언어라는 것이 있다. 부정적 이야기나 불쾌한 이야기가 뒤따라 오기 때문이다. 들으면 긍정적 이야기나 마음이 흐뭇해지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말은 모든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방송 권장’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살면서 그렇게 쏟아지는 많은 낱말을 만나보며 유쾌한 날씨로 이끄는 삶 속에 권장언어를 찾아 여행을 떠나본다. 낱말 속 이야기가 주는 유혹이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이야기 낱말 분홍빛 이야기 부정적 이야기 긍정적 이야기
2022.04.04. 2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