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저 하늘에 그려진 청춘의 색 붉음도 푸름도 아닌 보랏빛 노을입니다 검은 나무들이 새 옷 입은 5월! 마을 회관 잔치 마당에 보랏빛 노을이 한 가득 이네요 떠난 지 오랜 고향 생각일랑 버리시고 웃음 바다에 빠져 봅시다 깃털 하얀 잔디가 손짓하는 길에서 사랑에 굶주린 낙엽들 주름을 펴세요 예쁘고 행복하라고 만들어진 설레는 잔치 아픔 고통 잊으시고 덩실덩실 흐르는 음악 소리 맞추어 손 흔들어 춤을 추세요 삶을 마음껏 즐기세요 다이아몬드가 뚝 뚝 떨어지는 오동나무 그늘 아래 예쁜 꽃들이 우리들인 걸 잊지 마세요 때 이른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5월 아픔일랑 털어내시고 크게 웃으세요 외로움의 소굴을 탈출하세요 광옥 같던 얼굴에 검 버섯도 좋아서 웃을 겁니다 파랑새 뛰노는 길에서 보랏빛 노을들! 모여 모여 크게 웃으며 살아요 우리 엄경춘 / 시인문예마당 보랏빛 노을 보랏빛 노을들 오동나무 그늘 아픔 고통
2025.06.19. 19:00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입에 넣은 사탕은 달콤했어요 하늘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고요 손을 뻗어도 당신은 내 곁에 없어요 소란한 삶이 싫어 이곳에 왔어요 열 번쯤은 떠나왔고 몇 번은 도망쳤어요 멀리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지 말아야 했어요 잔가지에 걸린 하늘이 아득히 번져와요 꽃 한 송이 피워 당신께 가려고요 길에서 넘어진 노을을 주웠어요 흥건히 핏빛 되어 하늘에 걸려있어요 가까이 가면 뒷걸음치는 꿈을 꾸어요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어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이어요 서쪽 창가 물들은 고요는 아직 따뜻하고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될 때까지 밀려오고 있어요 하늘로 날아간, 슬픔 안으로 숨어버릴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호수를 바라 보고 서 있어요. 호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지만 다정해요. 앉아서 바라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서서 보려고 해요. 아침이 밝아 오는 호수 그리고 하늘, 하얀 물새들과 반짝이는 조약돌, 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다워요. 이 세상을 떠날 때, 크고 위대한 당신 앞에 설 때 바로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도 가끔 하곤 했어요. 바라보지 못한 풍경, 만나지 못한 사람,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 사연들과,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일찍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들과,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저 물새들의 대화와, 하얀 거품을 물고 출렁이며 다가오는 파도의 사랑과 속삭임이 그리울 때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했어요. 저 바다 끝 어둠을 뚫고 붉은 몸짓이 연기처럼 아니 안개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네요. 수평선으로 번져 가는 붉은 하늘은 아주 크고 동그란 물방울처럼 떠 오르고 있어요. 육안으로도 보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수면 위를 차오르고 있어요. 호수가 낳은 신비한 알 같아요.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프락사스의 몸짓 같아요. 이제 그 몸이 미시간 호수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해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침내 하루가 떠올랐어요. 신기하기보다 경이로워요. 하루가 떠오르는 동안 고요는 모든 것들의 입을 잠잠히 정지시켜요. 멀리 파도가 밀려오고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가 쓸려 왔다 빠져나가요. 호수의 표면에 새의 깃털 같은 윤슬이 반짝거려요. 하루가 또 이렇게 시작되고 있어요. 호수를 바라 보고 서 있어요. 호수와 하늘이 마땅한 곳에 연분홍의 띠가 수평선 가까이 드리워져요. 어둠이 서서히 찾아들기 시작할 때쯤 하늘은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어요. 호수의 수평선 위로 붉은 물감이 퍼지듯 번져 갔어요. 느린 동작같은 풍경 속에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낮이 밤으로 천천히 바꾸어 지고 있어요. 수평선 위에 띠처럼 번져 오던 노을은 벌써 하늘의 반을 덮어 가고 있어요. 그 반대편으로 하얀 보름달이 외롭게, 겸허하리만큼 의연하게 노을을 바라 보고 있어요. 이 풍경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요. 닮고싶은 풍경이에요. 일출과 일몰 사이로 하루라는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어요.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노을이 되어 가요. 노을이 지듯 우리의 삶도 저물어 가겠지요. 그러나 낙담하지 마세요. 이제 우리 앞에 형형색색의 별이 뜰 거예요. 캄캄한 밤하늘에 등불이 되어주는 별들의 대화가 한창일 거예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당신의 길을 비취겠지요. 베개를 끌어안은 당신에게 잘 자라고 머릿결을 어루만져 주겠지요. 뭇별들이 수를 놓으며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겠지요. 유독 당신의 새벽 창에 끝까지 남아 곤한 잠자리를 지켜줄 별빛 하나 보이겠지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노을 미시간 호수 때쯤 하늘 수평선 위로
2024.08.26. 15:04
말리부는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바이브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LA 핫플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타운이다. 세계적 관광 명소이며 LA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지만 막상 방문해 보면 심심할 만큼 고요하고 딱히 할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LA 서쪽 끝 산타모니카에서도 PCH를 타고 15분 이상은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이 해변 마을은 그 흔한 프랜차이즈 상점도 구경하기도 힘들고 작은 부티크들과 곳곳에 숨어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적은 수의 레스토랑이 전부다. 그러나 말리부 해변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하이킹 코스와 오션뷰 레스토랑, 석양이 일품인 작은 해변, 개성 있는 상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나만 알고 싶은 핫플이 된다. 바로 그 어디도 아닌 말리부다. ▶하이킹 코스 만약 이른 아침 이곳에 도착했다면 하이킹부터 시작하자. 말리부 인근엔 하이킹 코스가 꽤 있지만 조용한 아침 시간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말리부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주마 릿지 트레일(Zuma Ridge Trail)이 좋다. 이곳은 하이킹하면서 산과 바다를 모두 감상할 수 있으며 인근 다른 코스보다 덜 복잡해 아침 시간의 고요와 평화를 즐길 수 있다. 또 계절에 따라 야생화도 감상할 수 있다. 트레일을 완주하는데 2시간가량 소요되며 트레킹 난이도는 보통이어서 시니어들도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다. ▶쇼핑 트래킹 후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면 말리부 컨트리 마트(malibucountrymart.com)로 이동하자. 이곳은 말리부 쇼핑몰로 백화점은 없지만 유명 의류 단독매장 및 카페, 식당, 마켓이 있어 볼거리와 먹을 거리가 많다. 커피숍으론 스타벅스와 알프레도 커피숍이 있으며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스테이크 하우스, 캐주얼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다. 그리고 ba&sh, 존 바바토스(John Varvatos), 빈스(Vince), 올리버 피플(Oliver Peoples) 등 일반 쇼핑몰에서는 보기 힘든 유명 브랜드 단독 매장과 고급 편집매장 론 헤르만(Ron Herman) 등도 입점해 있어 윈도우 쇼핑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진다. 이외에도 이곳엔 홀푸드 마켓도 입점해 있어 그로서리 쇼핑은 물론 커피와 간단한 식사도 즐길 수 있다. ▶볼거리 이렇게 쇼핑하다 지치면 다시 차를 타고 PCH를 달리면 된다. 말리부에서 벤투라 카운티쪽으로 운전하다 보면 아름다운 동네 풍경부터 서퍼들의 성지와 바위 절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경과 마주치게 되는데 멀리 가지 않고도 해외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든다. 드라이브하다 마음에 드는 해변과 마주치면 정차해 잠시 해변을 걷는 것도 좋겠다. 비치타월 한 장 들고 해변 풍경을 즐기기 좋은 곳으로는 말리부 라군(Malibu Lagoon State Beach)과 말리부 서프라이더 해변(Malibu Surfrider Beach) 등이 있다. 말리부 라군은 철새들이 몰려드는 석호가 있어 바위에 걸터 앉아 해변 풍광과 철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숨은 보석으로 알려진 말리부 힌두 사원(malibuhindutemple.org)도 방문해볼 만하다. 순백의 사원 건물에 황금색 장식이 이국적인 이곳에 서 있으면 캄보디아나 태국 어느 사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오후 늦게까지 말리부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면 일몰 감상은 필수. 말리부에서 노을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은 엘 마타도르 해변(El Matador State Beach). 이곳은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만과 바다 동굴이 있어 사진작가들이 즐겨찾는 해변인데 특히 노을이 아름다워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는 핫플이다. 주말엔 복잡할 수 있으므로 일몰 1시간 전에 도착해 거리에 주차 후 절벽 옆 계단에 타월이나 담요를 깔고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 ▶식당 말리부는 문섀도(Moonshadows Malibu)나 노부(Nobu Malibu) 같은 유명 레스토랑 외에도 파인 다이닝부터 캐주얼 다이닝까지 다양한 식당들이 있다. 만약 말리부 바이브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바다 쪽을 향해 난 작은 피어 위에 있는 '말리부 팜(malibu-farm.com)'을 방문해 볼 만하다. 하얀 목재 건물과 푸른 지붕이 동부 고급 휴양지 마르타스빈야드에 있는 서머 하우스를 연상키는 이곳은 독립된 2개의 건물이 있어 카페와 식당이 따로 운영된다. 그래서 샌드위치나 버거처럼 캐주얼한 식사와 커피, 음료를 즐기고 싶다면 카페를, 피자와 파스타, 스테이크, 타코 등 푸짐한 식사를 하고 싶다면 레스토랑을 방문하면 된다. 카페는 주중 오전 9시~오후 6시, 주말에는 오전 8시~오후 8시까지 오픈한다. 이주현 객원기자해변 노을 말리부 해변 해변 풍경 해변 풍광
2023.10.19. 19:14
한 생의 회랑에서 사랑도 미움도 수 없이 얽혀 있는 삶의 고달픔 다 내려놓고 서방정토 나선 길 떠남도 남아있음도 서쪽 하늘로 기울어진 업이 무거워 장엄한 만다라의 불꽃을 피운다 다시 이 길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정화 의식을 치르고 있다 긴 여운으로 남긴 초월의 시간 아미타불 가슴에 두 손을 모은다 양기석 / 시인·퀸즈글마당 노을 서쪽 하늘 서방정토 나선 마지막 정화
2023.07.28. 17:49
낮이 밤으로 올라서는 엘리베이터 층층이 발걸음이 멈추어 갇힌다 허기진 눈동자의 끝자락을 노을이 쥐고 있다. 고물 수레를 끌고 가는 남자의 시간을 따라 막 지난 버스의 먼지 자락에 끝을 노을이 쥐고 있다. 붉음은 여자의 이마에 줄기줄기 호박 넝쿨들 태열은 금관으로 꽃이 열리고 분홍은 회색을 미래로 쥐고 있다 밤이 낮으로 내려서는 엘리베이터 만남을 이별로 이별을 해후로 층층이 발걸음이 흩어진다 빈 손바닥이 허공을 감싸 보지만 노을이 온기를 쥐고 있다 굴레의 시작은 어제가 되고 끝은 미래가 되고 미래는 오늘이다 남자의 연고지는 몇 층에 있을까 여자의 연고지는 몇 층에 있을까 담을 수 있는 회상을 노을은 층층이 펼쳐 놓는다 임의숙 / 시인·뉴저지글마당 노을 층계 이별로 이별 호박 넝쿨들 먼지 자락
2022.08.19. 18:27
엄마가 사는 강원도 횡성에는 섬강이 흐른다. 둑길을 따라 올라가면 월천(月川)이 있고 그 강가에 두꺼비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는데, 그 모습을 따서 두꺼비 섬(蟾) 섬강이라 불린다니 이름도 예쁘다. 자연이 좋아지면 나이가 든 거라 하던데 세월은 깊이를 더하고 마음의 눈은 순해진 탓일까. 이토록 절절히 자연이 가슴에 스며들 줄이야. 병풍 같은 산새에 둘러싸인 도시, 횡성은 수려하다. 거기에다 매일 눈을 뜨면 느린 황소걸음처럼 기지개하는 태양과 그렁그렁 물소리를 들으며 사는 이곳 농촌 사람들의 순수와 인간미의 아름다움을 말해서 무엇하랴. 이 작은 도시에는 시(詩)를 공부하는 문학 교실이 있다. 엄마는 이 문학반의 학생이고 나는 엄마의 수업에 하루 방문객으로 참가했다. 깨끗하게 정돈된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창동 감독 영화 시(詩)가 연상되었다. 창가 빛에 반사되는 희끗희끗 빛나는 은물결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초로의 학생들,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하고 뭉클하여 나는 가만가만 숨소리를 조절해야만 했다. 이 시골의 아름다운 분들은 왜 이곳에 앉아 모든 시작과 끝을 허투루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눈동자로 언어의 밭갈이에 열중하는가?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내면서 설명이 잘 안 되는 그런 지점에서의 사유의 폭을 넓혀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몸짓일까, 밥벌이와 상관없는 놀이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네모난 책상과 전쟁을 치르며 내재적 귀족 그 눈부신 왕관을 꿈꾸는 자들이 시를 공부하는 이분들이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칠판에는 ‘박순남 시인 따님, 고국 방문 환영!!’이라고 쓰인 글씨와 환영식의 꽃다발, 박수 소리!! 먼 곳으로 시집간 딸의 부재를 채워주시어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문학과 엄마의 문우, 그분들께 감사하여 그날의 수업은 시의 강물로 넘쳐흘렀다. 준비해온 자료가 넘치도록 열정적인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와인 잔을 높이 올리며 다시 한번 축하의 파티를 이어갔다. ―그날이 이렇게 눈에 아련한데 87세 엄마를 고국 땅에 남겨두고 나는 벌써 뉴욕에 도착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들은 가곡을 부르고 하모니카를 불며 시를 쓰는 엄마의 왕성한 삶의 열정에 혀를 내두르며 엄마의 건강이 염려 없다 하지만 돌아가는 굴렁쇠를 놓으면 멈추리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굴렁쇠를 돌리는 엄마의 힘겨운 손짓을 나는 알고 있다. 어젯밤 전화를 하니 엄마는 써놓은 시를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영화광인 내가 올해에 본 최고의 영화 노마드랜드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 그 시가 엄마의 얼굴에 오버랩 되었다.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아니, 그대는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중략)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그러나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에 혹은 자연의 계획된 이치 때문이건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은 시들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 속을 헤맨다고 자랑하지 못하리라/ 그대는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인간이 숨을 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깐 빌려 살고 가는 이방인이고 순례자이고 길 위에 노마드이다. 언젠가는 엄마의 여행이 끝나고 섬강에 노을은 질 것이다. 섬강에 노을이 지면 출렁이는 물결 속에 당신의 시 같은 맑은 웃음소리 물풀에 흔들릴 것이다. 곽애리 / 시인삶의 뜨락에서 섬강 노을 시가 엄마 영화 노마드랜드 두꺼비 모양
2022.06.30.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