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사이트]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정책
지난 9월 26일, 한국의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센터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가 발생했다. 그 결과, 온라인 행정 서비스인 정부24, 모바일신분증, 국민신문고 등을 포함해 수백 개의 시스템이 중단됐다. 한 달이 지난 현재에도 완전한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필자에게 이 사태는 충격적이다. 대규모 응용서비스 개발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명제가 한국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응용 시스템은, 어떤 이유로든 시스템이 고장 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설계돼야 한다. 기술적 오류, 인재, 자연재해, 테러·전쟁 등 가능성은 무수히 많다. 특히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디지털 서비스라면 더 엄격해야 한다. 즉, 시스템 전체가 중단되는 'Single Point of Failure(단일 장애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장애가 발생해도 피해가 작아야 하고, 설사 복구가 지연되더라도 서비스 중단이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데이터 백업은 물론, 서비스의 이중화 등이 필수다. 또한, 요즘처럼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핵심인 시대에는 데이터 손실은 치명적이다. 기계나 서버는 교체가능하지만, 한 번 사라진 데이터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수집할 수 없다. 따라서 데이터 보호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 건물의 작은 화재 하나로, 국가의 디지털 기본 서비스 상당수가 마비된다는 것은 바로 이 기본 명제가 무시되었음을 의미한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고, 정부는 해결책을 약속했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서비스만 중단되었고, ‘데이터는 백업 돼있다’는 말만 되풀이되었다. 마치 화재가 문제이지 시스템 설계와 정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한 대응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정부 발표에 따르면 예산 부족으로 서비스 이중화는 구현하지 못했고, 백업만 해놓았다는 것이다. 데이터는 지키려 하지만 서비스는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로서 이는 너무 위험하다. 디지털 전환으로 서비스만을 우선 앞세웠다면, 그 전환이 오히려 인재, 재해, 테러 등 위기 상황에서 국가 전체를 무방비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국민의 삶을 ‘운’에 맡기겠다는 것인가? 무사안일과 반복된 경고의 무시는 또 다른 형태의 위험이다. 예산이 부족했다면 디지털 서비스 자체를 늦춰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술 문제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기술적인 해결책은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정책이며, 책임의 주체인 정부의 인식이다. “국민의 불편에 죄송하다”는 말은 정부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서비스 중단으로 인한 실질적 피해가 전국 단위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덮으려는 태도다. 다수의 국민이 실제로 피해를 보고 있는데, 그 피해액이 얼마인지 산출하여 국가 차원에서 투명하게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디지털 서비스의 대규모 중단 또한 다수가 피해를 겪는 중대사고이며, 또한 이미 반복되고 있는 일이기에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정부도 이 법에 의해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디지털 정부라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가 진정으로 안전해지려면, ‘언제든 고장 날 수 있다’는 기본 전제를 설계 단계부터 고려해야 한다. 이중화·백업·테스트·모의훈련은 기술이 아니다. ‘책임 있는 설계’이고 정책이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는 조속히 디지털전환과 서비스시스템에 관한 근본적인 재정비를 해야 한다. IT강국, AI강국 같은 거창한 목표도 현재와 같은 인식으론 작은 화재 하나로 또다시 붕괴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김선호 / USC 컴퓨터 과학자AI 인사이트 문제 기술 대규모 응용서비스 서비스 중단 서비스 이중화
2025.10.28. 2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