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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 때 그 시절, 그대 곁에 머문다

가을이 온다. 오고 있다. 가을이 왔다. 떠날 때는 따스한 햇살 뭉치가 여름의 끝자락에 매달여 울굿 불긋 실타래처럼 반짝거렸다.   여행 떠나기 전 정원사 아저씨께 깻잎은 한잎씩 따서 봉지에 담고 토마토는 빨갛게 익은 것만 골라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돌아온 날부터 날씨가 싸늘해지더니 숲 속 나무들이 초록옷을 벗고 활옷을 입기 시작한다. 떠나보낼 겨를도 없이 나무들은 다음 계절로 화폭을 펼친다.     가을은 낙엽의 갈 길을 재촉한다. 미련 없이 서둘러 떠나던 그대 뒷모습처럼 바람에 섞여 안개처럼 흩어진다. 처음 만난 모습보다, 흩날리는 바바리 코트의 기억으로 남은 그대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작별의 옷자락을 여민다.   ‘세월이 유수로다 어느덧 또 봄일세. 구포에 신채나고 고목에 명화로다. 아이야 새술 많이 두었으라 새봄놀이 하리라’ 세월유수(歲月流水)는 고종 때 가객 박효관이 ‘가곡원류’에 실린 시조에서 유래한다.   가을이 오면 죽기 살기로 깡술을 퍼마시던 가난한 문우들 생각이 난다.     모두 가난했다. 허름한 주머니에는 구겨진 화선지 한장과 해묵은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직업이 불분명한 시인 지망생이거나 연중행사로 신춘문예에 낙방한 소설가들은 해가 지면 이조주촌이나 대동강 막걸리 집으로 스며들었다.   돈 버는 사람, 돈 가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매일 술을 마셨는지 아리송하다.     ‘저녁은 사치’라고 주장, 안주 없이 깡술을 한 잔이라도 더 마시는데 합의, 나는 술을 전혀 못 먹어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매일 모여서 마셨는데 술값은?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총대 매고 시계를 잡히거나 윗도리를 벗어 계산했다.   ‘적당히 마셔라.’ 혀를 끌끌 차며 대동강 아줌마는 외상장부에 적는둥 마는둥 했다. 아줌마는 여태 살아 계실까? 신세가 비슷하면 가난을 깃발 삼아 끼리끼리 뭉친다.     함께 있으면 행복했다. 내일이 암울해도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젊었고 열정과 패기는 두려움을 극복했다. 문인 지망생 김원도를 주축으로 주변문학 동우회 작품집을 출간했다. 원도는 청춘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고집이다. 굶주림과 절망은 생명의 불꽃마저 어둠으로 덮는다.   시차 극복으로 뒤척이는데, 밤 12시 가까운 시간에 어둠 속에서 이웃 애들이 공차기로 야단법석이다. 아이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지치지도 않고 공놀이를 한다. ‘헐!’ 하고 놀랐다가 슬며시 혼자 웃는다. 내게도 저런 미친 날들이 있었지.   주린 배 움켜쥐고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던 그 시절!     추억은 중독성이 강하다. 순수하고 새록해서 머무르고 싶은 순간으로 비행한다.   때늦은 멜랑콜리로 흩어지는 낙엽에 시름을 묻는다. 늦은 나이에 샌티멘탈이라니.     ‘그대여, 여기 바다가 보이고 / 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씩 좋은 추억에 / 바다를 더욱 아름답게 하지만 / 그대여, 다시 돌아온 이 바닷가 / 그대 떠나간 조금은 슬픈 추억 때문에(중략) / 그대 그리워 다시 찾아올수 있겠지 / 나의 슬픈 바다여, /지쳐버린 내 마음 쉬어 갈 수 있는 곳 ‘-조정현 ‘슬픈 바다’ 중에서     잊었다고, 모든 것이 지나갔다고, 스쳐가는 바람의 날개짓이나, 속절없는 세월의 빛바랜 낙엽이라 해도, 그 때 그 시절, 함께 꿈꾸던 약속의 언어들은 허공과 우주를 넘어 영원토록 그대 곁에 머문다. (Q7editions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대동강 아줌마 주변문학 동우회 대동강 막걸리

2025.10.2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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