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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친구

가을이다. 어느새 이렇게 계절이 바뀐다. 여름 내내 땡볕 내리 쬐던 이곳 캘리포니아도 어쩔 수 없이 가을 냄새가 풍긴다.   시절의 변화는 옷차림에서 온다. 처음 미국에 와서는 여름 겨울 관계없이 반팔을 입었는데, 오래 살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옷장을 열어본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쑥색 콤비 상의가 걸려있다. 쑥색 재킷. 저 옷을 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어쩌면 그 친구를 떠올리고 싶어 옷장 제일 앞쪽에 저 옷을 걸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생활할 때 그를 처음 만났다. 광주 학생회관 도서관에서였다. 나도 그도 방송통신대학 신입생이었다. 시골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지방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사표를 내고 공부를 하고 있는 당찬 친구였다. 나는 나대로 그 친구보다 더한 깡촌 태생으로 어찌어찌 고등과정을 마치고 일반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통신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 해, 한국방송통신대학이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방송과 통신을 통해서 공부를 한다는, 당시에는 무척 생소한 학교였다. 그 학교에 지원하여 학생이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제1회 입학생이었다. 72105-12080. 잊히지 않는 학번이다.   2년제 초급대학 과정으로 학사관리를 엄격히 하여 졸업생은 4년제 대학 편입학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학사관리는 엄격했고 학과에 따라 달랐지만 졸업생은 우리 과의 경우 입학생의 18%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졸업 무렵이 되자 편입학을 원하는 사람은 ‘편입학 자격 검정고시’를 보아야 한다는 공고가 났다. 우리는 서울의 모 대학 3학년 편입시험에 함께 응시하여 나란히 붙었다.   나도 그도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학교 부근에 방을 얻어 생활을 하고, 나는 동가식 서가숙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이따금 친구 집에 들러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었다. 아들 친구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따뜻한 고봉밥이었다. 어머니는 짠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어머니의 저 심성을 아들이 이어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학은 같이 했지만, 나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해야만 했고, 친구는 제대로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그는 직장을 얻어 대전에서 근무했다.   휴학 후, 나는 학비를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대전에 들렀다. 친구가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입고 간 점퍼가 추워 보였던지, 신사복 코너에서 쑥색 콤비 상의를 사서 나에게 입혀주었다. 신입사원 월급으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을 터이다. 재킷을 걸친 내 모습을 보더니 “옷이 날개네 이사람, 자네 한 인물 나구먼”하며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빙긋이 웃었다.   친구가 사 준 옷을 입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참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런 친구가 곁에 있어 세상살이가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고, 나는 또 친구를 위해 뭘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중에 나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친구가 ‘가면서 점심이나 사먹으라고’ 나에게 꼬깃꼬깃한 100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때 ‘달러’라는 미국 돈을 처음 만져보았다. 그런데 비행기에 올라와 보니 먹을 것은 공짜였다.   친구가 사 준 쑥색 콤비 상의를 미국에까지 가져와서 10년 넘도록 입었다.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닳아 오래 입은 티가 역력했지만 버리지 못하고 옷장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옷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그 옷 너무 바랬으니 버리면 안 되겠냐’고 해서 못이긴 척 그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색깔 쑥색 콤비 재킷을 구입했다.   친구는 그 후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몇 년 전 정년퇴임을 했다. 전공과목 저서를 출판할 만큼 연구와 학생 교육에 혼신을 다 했고, 주요 보직을 맡아 학교 발전에도 한 몫을 했다. 퇴임 후에도 이런저런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측은지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친구의 모습은 늘 나를 일깨워준다. 돌이켜보면 그는 나의 벗이자 스승이었다.   가을이 깊어간다. 나도 어느새 미국생활 40년이 넘었다. 지금도 어느 장소에서 쑥색 콤비 상의를 입은 남자를 보면 ‘어, 옛날 내 옷하고 똑같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머잖아 쌀쌀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사람 좋은 웃음을 빙긋이 잘 웃던 친구 김일중. 그가 그립다. 정찬열 / 시인·수필가이 아침에 찬바람 친구 아들 친구 늦가을 찬바람 대학 편입학

2025.11.1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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