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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집 주거지 전환 가속…개성 입혀야 활력

LA 한인타운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윌셔가를 따라 늘어서 있던 고층 오피스 건물들이 하나둘씩 아파트로 바뀌고 있다.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와 하이브리드 근무가 확산하면서 오피스 수요는 급격히 줄었다. 자연히 공실률은 팬데믹 이전 12% 수준에서 지금 30%까지 치솟은 건물도 있다. 버몬트에서 웨스턴 애비뉴까지의 윌셔가 구간만 보더라도 다섯 곳 이상의 오피스 건물이 이미 아파트로 바뀌었고, 두 곳은 현재 전환 공사가 진행 중이다. 건물주들은 더는 오피스 임대만으로는 건물을 유지할 수 없게 됐고,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주거지로의 전환’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한인타운 고층 오피스의 절반 가까이가 이미 주거시설로 전환되었거나 전환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단순한 부동산 트렌드가 아니라, 한인타운의 도시 구조와 생활 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걷기 힘든 도시, 한인타운   문제는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도시가 저절로 활기를 띠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인타운은 여전히 ‘걷기 힘든 도시’다. 홈리스 문제와 치안 불안 요인이 크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건축 설계와 도시 구조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상가가 대로변에서 직접 연결되지 않고, 건물 한쪽 로비나 후면부 주차장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이는 보행자가 거리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상점을 이용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상점의 ‘가로변 접근성’이 없으니 거리에 사람의 흐름이 생기지 않고, 결국 윌셔가는 보행자의 발길이 끊기고 홈리스의 점유 공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실제로 필자가 연구한 ‘Street Frontage Accessibility(대로변 접근성)’ 지표를 보면 차이는 극명하다. 샌디에이고의 리틀 이탈리아나 LA 다운타운의 리틀 도쿄는 64~72% 수준이었지만, 윌셔가는 고작 9.2%에 불과했다. 이는 한인타운의 거리가 왜 걷는 도시로 자리 잡지 못하는지 보여주는 수치다. (아래 다이어그램 참고)   ▶다른 도시는 어떻게 했나   비슷한 오피스 공실 문제를 겪은 다른 도시들을 보면 시사점이 크다.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 이스트나 샌프란시스코의 SoMa 지역도 팬데믹 이후 오피스 공실률이 크게 올랐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건물 1층이 카페, 식당, 소매점 등 보행자를 끌어들이는 리테일로 구성돼 있어 거리의 활력이 유지됐다. 건물이 거리에 열려 있었기에 보행자는 여전히 걷고 머물렀고, 도시 회복 속도도 빨랐다.   결국 문제는 단순히 건물 용도를 아파트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건물이 거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주거 인구가 아무리 늘어도 상점과 거리가 단절돼 있으면 거리는 여전히 비어 있게 된다.     ▶윌셔길이 가진 잠재력   그런데도 윌셔길은 큰 잠재력을 품고 있다. 한인은행과 LA 총영사관을 비롯해 남가주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교 예배당 등 역사를 지닌 종교 시설들이 모여 있고, 메트로 레드·퍼플 라인이 버몬트, 노먼디, 웨스턴에 정차해 교통 접근성도 탁월하다.   물리적 조건 또한 강점이다. 윌셔길의 보행자도로 폭은 18~20피트로, 인근 6가(10피트), 올림픽(15피트)보다 넓다. 이 넓은 도로가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라, 야외 테이블과 조경이 어우러진 ‘확장된 공원’으로 변신한다면 어떨까? 식당의 야외 공간이 거리에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걷다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맥주 한잔을 이어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다. 리틀 이탈리아나 리틀 도쿄처럼 ‘걷는 재미’가 있는 거리로 한인타운이 변모할 수 있다.   ▶무엇이 필요한가-정책적, 설계적 제언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첫째, 시 차원에서 도로변 공간 활용 규제를 완화하고, 거리의 조경과 미관을 관리해야 한다. 두번째, 상가 전면부가 높이 차이 등으로 인해 보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공사지원금 보조 등 인센티브를 제공해 거리로 열린 상업 활동을 유도해야 한다. 이렇게 상업 활동이 거리로 확장되면, 상가 업소 주인과 경찰의 협력이 강화돼 홈리스 문제도 점차 완화될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포켓 광장이다. 윌셔가의 고층 건물은 다른 지역보다 오픈 스페이스가 많은데, 대부분 방치돼 있다. 이를 단순한 빈 곳이 아닌, 다양한 행위를 담을 수 있는 소규모 광장으로 재편하면 미관적·기능적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걸어서 3분마다 새로운 공공 공간을 만나는 도시를 상상해보자. 주말에는 프리마켓과 파머스마켓, 여름에는 미니 콘서트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된다면 한인타운의 매력은 배가될 것이다.     네번째, 바로 도시 상징물의 입지다. 한인타운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인 ‘다울정’은 현재 한인타운 남쪽 노먼디길 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곳은 보행자와 상업 활동이 거의 없는 구간이라, 상징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물의 존재감이 약하다. 도시 상징물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경험하는 장소에서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LA 리틀도쿄의 오봉 축제를 상징하는 등롱 조형물과 파이어타워나, 샌디에이고 리틀 이탈리아 거리에 놓인 초대형 빨간 의자는 그 자체로 사진 명소가 되며 보행자와 상업 활동이 결합된 곳에 있어 도시 브랜드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물은 반드시 사람들이 걷고 소비하는 구간에 놓여야 기억되고 사랑받는다. 한인타운의 상징물 역시 마찬가지다.   ▶결론, 도시의 얼굴은 거리에서 만들어진다   한인타운은 지금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고층 오피스의 주거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시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걷기 좋은 거리, 활발한 상업, 그리고 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도시 상징이 함께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진다.   윌셔길은 이미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보행자가 걸어도 안전하고 즐거운 거리, 상업 활동이 거리에 흘러나와 활력을 만드는 도시, 그리고 상징물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공간이 될 때, 한인타운은 단순한 코리안 BBQ의 명소를 넘어 LA를 대표하는 문화적 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얼굴은 건물 안이 아니라 거리 위에서 만들어진다. 한인타운의 상징물이 살아 숨 쉬는 도시의 무대 위로 옮겨질 때, 비로소 이곳은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주거지 전환 도시 한인타운 한인타운 고층 오피스 건물

2025.09.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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