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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장인이 끓인 서민 한끼, 라멘

한국인에게 사나이의 눈물을 자아내는 신라면이 있다면, 일본인에게는 ‘면’이라는 음식의 깊이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라멘이 있다. 단순한 국수 한 그릇 같지만, 라멘은 일본 음식 문화의 집요함과 장인정신이 농축된 결과물이다.   라멘은 엄밀히 말해 일본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건너온 밀가루 면과 국물이 요코하마·하카타 같은 항구 도시를 통해 퍼지면서 일본식으로 재해석되었다. 이후 지역별로 육수와 간, 면발을 달리하며 발전했고, 전후 일본의 대중식 문화 속에서 ‘서민의 한 끼’이자 ‘장인의 음식’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갖게 됐다.   대부분의 일본 라멘에는 돼지고기 차슈가 올라간다. 그래서 돼지고기 특유의 향을 이겨내지 못하면 라멘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기 어렵다. 특히 돈코츠 라멘은 돼지뼈를 장시간 고아낸 육수가 핵심인데, 이 국물은 일본 열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의 잘 끓인 돼지국밥 육수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문화는 달라도 혀가 기억하는 감각은 비슷하다.   라멘은 육수와 간에 따라 성격이 뚜렷하게 갈린다. 진하고 묵직한 돼지 육수의 돈코츠 라멘, 일본 된장을 더해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낸 미소 라멘, 간장 베이스의 닭·해물 육수로 맑고 정갈한 쇼유 라멘, 소금으로 간을 해 담백함을 살린 시오 라멘까지, 한 그릇 안에 지역성과 철학이 담긴다.   LA 한인타운에서 최고의 라멘집을 하나 꼽으라면 웨스턴과 7가 인근의 이키라멘을 빼놓기 어렵다. 유명 일식집 매니저 출신의 인도네시아계 중국인이 운영하는 이곳에서 특히 인상적인 메뉴는 간장 베이스의 쇼유 라멘이다. 국물은 깔끔하고, 차슈에서는 돼지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차슈를 꺼리는 일행에게는 매운 비건 미소 라멘을 권할 수 있는데, 고기 대신 두부가 올라가 단백질 식감까지 살렸다. 유자 향이 은은한 시오 라멘도 신선하다. 저녁 시간에는 사케와 곁들일 수 있는 이자카야 메뉴와 오마카세까지 즐길 수 있어, 손님 구성도 백인·히스패닉·아시아계가 자연스럽게 섞인다. LA 본점을 중심으로 웨스트 LA와 할리우드까지 지점을 둔 이유가 분명하다.   8가 옥스포드 센터의 슬러핑 라멘은 한인타운 라멘 지형도를 바꾼 집이다. 한인타운 최초의 본격 돈코츠 라멘 전문점으로, 짙고 진한 국물을 선호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다. 낮은 식탁 대신 높은 공용 테이블과 바 스타일 좌석은 ‘후다닥 먹고 일어나는’ 라멘 문화에 충실하다. 쇼유 라멘은 따로 없지만, 간장 베이스의 베지 라멘은 채소가 산처럼 올라와 만족도가 높다. 동네 히스패닉 주민들도 부담 없이 드나드는, 말 그대로 ‘동네 편한 맛집’이 됐다.   채프맨 플라자에는 실버레이크에서 시작해 신화를 쓴 실버레이크 라멘의 가맹점이 성업 중이다. 주력은 역시 진한 돈코츠 라멘이다. 파킹 공간도 변변치 않던 예술가 동네 실버레이크에서 출발해, 맛 하나로 줄을 세우더니 지금은 30여 개가 넘는 지점을 둔 브랜드로 성장했다. 채프맨 플라자점 역시 한인 손님보다 외국인들에게 더 유명하다. 오래 공사를 거쳐 문을 연 공간은 이제 타운의 또 다른 명소가 됐다.   웨스턴 6가 마당몰 2층의 코판 이자카야는 라멘과 일식 전 메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모두푸드는 코판 라멘, 영동순두부 등을 포함해 40여 개 매장을 보유한 한인 외식업계의 강자다. 가부키 출신 경영진들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는 LA 일식 시장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다.   윌셔와 알렉산드리아 코너, 옛 산누들 자리에 새로 문을 연 아카토라 라멘은 돼지 육수 중심의 흐름에서 한발 비켜 서 있다. 닭과 해물 육수를 사용한 쇼유·시오 라멘, 홍합 라멘이 주력이다. 계란밥, 차슈 덮밥, 명란 덮밥 등 곁들임 메뉴도 다양해 다시 찾고 싶게 만든다.   한때 해장 라멘으로 이름을 날렸던 6가와 카탈리나 인근의 텐라멘은 ‘오빠 라면’으로 간판을 바꾸며 한국식 라면집으로 변신했다. 투나 스팸 김치 라면, 스테이크 앤 에그 라면 등 이른바 ‘혼종 라면’ 메뉴들은 한인타운이라는 공간이 가진 유연함을 상징한다.   LA 한인타운의 라멘은 문화가 섞이고 변주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풍경이다. 돼지국밥과 닮은 국물에서 공감을 느끼고, 비건 라멘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으며, 한국식 라면으로 재해석된 그릇에서 타운의 정체성을 본다. 한 그릇의 라멘은, 오늘도 LA 한인타운이 얼마나 다층적인 공간인지 증명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장인 서민 한인타운 라멘 돈코츠 라멘 미소 라멘

2026.01.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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