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산 지 40년이다. 그동안 특별한 인종차별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며칠 전 집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저 없이 마음을 내주던 미국인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내가 사는 곳은 캘리포니아 사이프리스라는 작은 동네다. 베드타운(bed tow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큰 쇼핑몰도 없고 상업화가 덜 된 주택가라는 뜻이다. 15년 전, 살고 있던 2층 타운 홈이 늙은이에게 불편해 지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이 동네의 나지막한 단층 주택으로 이사 왔다. 그때만 해도 이 골목은 거의 백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후 골목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은 한인, 아니면 인도계 사람들이었다. 교육열이 높은 이민자들이 학군을 찾아 이사를 왔던 것이다. 그날도, 여느 아침처럼 고요한 동네 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코너를 도니 어느 집 앞에 초등학생이 탈 만한 크기의 자전거가 가로등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FREE’ 라고 쓴 사인이 붙어 있었다. 손녀 녀석에게 주면 좋아할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들여다보았다. 멀쩡하고 튼튼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전거는 생각보다 커서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았다. 뒷좌석에 싣기로 했다. 차문을 열기 위해 자전거를 세우려 하다가 지지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길바닥에 자전거를 눕혀 놓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다시 자전거를 세우려하니 아이들이 들어 세우기에는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아하, 그래서 멀쩡한 것을 버리려고 한 것이었구나. 나는 자전거를 도로 있던 자리에 세워두고 차로 돌아왔다. 그때 뚱뚱한 백인 여자가 나타났다. 바로 근처에 살고 있는 성싶었다. 자전거를 손으로 가리키며 내 차로 다가오기에 그녀도 자전거에 관심이 있나보다 싶었다. 차에서 다시 내렸다. 내가 가져가려고 했더니 이런저런 문제가 있더라고 얘기해 줄 참이었다. “You don't live around here, do you?(당신 이 동네 사는 사람 아니지?)” “I do(여기 사는데요)”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는 “You don’t live at this house, or that house, or there.(당신은 이집 저집 저쪽 집에도 살지 않잖아)” 라며 이집 저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내가 다 아는데 너는 분명 이 동네 살지 않아”라는 그녀의 말이 “너 같은 사람이 왜 이 동네에 있느냐”는 뜻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어찌 그리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다. “너희 집 앞에 버릴 것이지….” 그녀는 계속 걸어가며 남의 집 앞에 왜 자전거를 놔두고 가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 하다가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속사포 같은 영어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습관이 안 된 한국 욕지거리도, 영어도 제대로 안 나오니 혈압이 정수리로 몰려드는 듯했다. 벙어리가 가슴앓이를 하다가 넘어갈 판이었다. 내 차는 아직 시동이 걸린 채였다. “It's none of your business, I know what I’m doing. Don't worry about me!(너나 잘해,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아.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하고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힘없이 허공을 날았고 그녀의 뒷모습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내가 자전거를 갖다 놓는 것을 네가 봤니? 그 소리를 놓쳐버린 것이, 네까짓 것이 이 나라 주인이기라도 한 거니? 라고 못한 것이 생각할수록 분했다.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너 아직도 여기 있니?' 하도록, 자주 그녀와 마주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평소 운동하는 곳으로 핸들을 틀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출근을 하고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갔는지 골목이 고요했다. 자전거가 기대어 있던 전봇대가 홀로 서 있었다. 갑자기 작은 자전거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 진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라도 그녀가 내가 갖다 놓은 물건이라며 질겁한 듯 어디 내던져 버리지는 않았을까. 어떤 아이를 충분히 기쁘게 해 주었을 자전거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누구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지나 않을까. 꼭 필요한 사람 눈에 들기 위해 자전거는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야 했다. 누군가의 집 앞에 어떤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억지 같다. 분란의 소지가 된 작은 자전거는 요즈음 매일 이민국에서 벌이고 있는 불시 단속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도 내게 이 나라 주인마님인 양 굴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돼 길에서 만난 미국사람이 내게 “Hello!” 해서 깜짝 놀랐다. '모르는 사람이 왜 말을 걸지?' 의아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인사는 물론 말도 붙이지 않았던 풍습을 가진 나라에서 건너온 나였다. 이런 이상적인 사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Good morning!” 그들의 정겨운 아침 인사는 좋은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그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 온 세월이 무색해져 버렸다. 동네 골목은 요즈음 예측할 수 없는 이민자의 미래처럼 우울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다. 집에 돌아와 괜히 미국인 남편에게 화풀이를 해버렸다. 갑자기 인종차별주의자 취급을 당해버린 남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주인마님 나라 동네 골목 동네 사람들 나라 주인
2025.08.21. 18:46
그 많던 아이들이 다 어디 갔을까. 그 시절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딜 가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새들의 합창 같았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를 때까지 해가 저물도록 뛰어노는 아이들로 골목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더구나 겨울방학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음박질치는 이 아이들의 해방된 장난기가 곧 온 동네를 활기차게 휘저을 것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 가정에 아이들 네댓 명은 보통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사오십 년, 혼자 자란 요즘 아이들에게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다정한 호칭은 무용해졌다. 아울러 과꽃이 피면 유난히 과꽃을 좋아하던 시집간 누나를 그리워하고, 뜸북새 울면 서울 가서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던 오빠를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과꽃’이나 ‘오빠 생각’ 같은 동요는 아주 오래전의 정서가 되었다. “둘만 낳자”가 “하나만”으로 바뀌고 농담처럼 “한 집 걸러 하나씩”이 회자 되더니 급기야 학교도 동네 골목도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출산의 서슬에 화들짝 놀라 “동생 낳아주기” 캠페인을 벌이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엄청난 반전이다. 사실 아이들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서 비록 고난 속에서라도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자체가 자연스러운 삶인데, 우리가 편의적인 잣대로 너무 성급하게 다음 세대를 재단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완전히 뒤집힌 정책이 과거 우리의 결정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지 못했는가를 말해준다. 어린이가 희망인 이유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라지면 학교도 사라지고 교사도 사라지고 꿈이 사라진다. 한겨울 추위에 가방도 없이 책보를 끼고 다녀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던 아이들. 지금 사진 속 이 아이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때 길 위에서 만난 거침없고 해맑던 아이들을 소환해본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어린이 희망 동네 골목 오빠 생각 언니 오빠
2024.01.28. 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