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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도둑이 남긴 것

저녁을 먹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동네 산책을 하며 알게 된 야마모토 할아버지의 아들 폴이다. 그는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되자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타주에서 이사 올 만큼 효심이 깊은 젊은이다. 그는 앞집에 오늘 도둑이 들었다며 혹시 우리 집은 피해가 없는지 물었다.   앞집은 얼마 전 일본에서 온 주재원 가족으로, 우리와는 이사하는 날 처음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히라노 부인이 딸을 데리러 나간 불과 30분 남짓한 사이, 도둑은 뒷마당으로 침입하여 잠겨 있던 거실 유리문을 따고 들어가 값나가는 귀금속만 골라 훔쳐 달아났다고 했다.   경찰이 출동하고 동네가 술렁였다. 평소 얼굴조차 모르던 이웃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무심히 스쳐 지나쳤던 한인 가정도 보였다. 나쁜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이웃을 마주하게 된 것이 반갑기도 했다. 우리는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 “유리창을 깨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서로를 위로했고, 자연스레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요즘 도둑들의 치밀한 수법도 들을 수 있었다. 주차된 차에 위치추적기를 달아두고 차가 움직이면 주인이 출타한 줄 안단다. 며칠간의 관찰 끝에 빈집인 걸 알고 범행에 나선다는 것이다. 택배기사가 수시로 드나드니 게이트가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따라 들어올 수 있다. 모두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후 HOA에서 여러 가지 방범 권고 메일이 도착했다. 보안 카메라 업체를 고용하거나 링(Ring) 도어벨 같은 초인종 카메라를 설치할 것, 가드너와 의논해 관목이 우거진 구역을 정리해서 도둑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줄일 것, 그리고 이웃 감시 프로그램(Neighborhood Watch Program)에 참여해 서로를 돌볼 것 등이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안내문이지만 이번에는 절박한 현실로 다가왔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그동안 게이트 안에 살며, 은행 안전금고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너무 안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밤이 되면 자동으로 켜지고 아침이면 꺼지는 조명을 여럿 주문해 설치했다. 해 질 녘 동네를 산책하며 보니, 보안 카메라 업체의 팻말을 붙여둔 집들이 확실히 늘었다.   며칠 뒤, 다시 ‘띵 똥’하고 벨이 울렸다. 총각김치를 담갔는데 맛이 들어서 가져왔다는 한인 엔지 엄마였다. 얼마 전 도둑 사건으로 알게 된 이웃이다. 이사 온 지 3년이 넘도록 파 한 뿌리 얻을 집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다.   담장 너머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전을 살피는 마음이 싹텄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다. 예기치 못한 도난 사건이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 준 것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큰 셈이랄까.  최숙희 수필가이 아침에 초인종 카메라 보안 카메라 동네 산책

2026.03.29.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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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개똥 주인을 찾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를 흥얼거리며 동네 산책을 했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는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아니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배꽃에 취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입은 연분홍 치마가 한몫했는지 이 노래가 절로 나왔다.   길을 걸으면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마주친다.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엄마, 여유 있게 걸으며 운동하는 할머니, 다정하게 걷는 부부,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많이 만나는 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하루 종일 집에서 오직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주인과 개의 운동이 한꺼번에 해결되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집 앞에 ‘개의 배설물은 반드시 수거해 가세요(Please clean up after your pet)’ 이라고 쓴 팻말을 종종 본다. 개가 아무 곳에서나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때문이리라. 요즘엔 반려동물 배변 미수거 시 과태료가 있고 경범죄 처벌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자기 개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다.     어느 교수가 말한 데로 자기 개의 똥은 자신이 치우는 최소한의 펫티켓은 지켜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오는데 우리 집 드라이브 웨이 위에 개의 그림이 그려진 파란 비닐봉지가 보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뜯어보지 않아도 금세 알았다.     세상에. 아니 뭐 이런 사람이 있어. 한국 사람이 산다고 일부러 이랬나 하는 피해망상적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개똥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해서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동네 네이버 후드 웹사이트에 7초짜리 영상이 떴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어느 집에 설치한 링 카메라에 찍힌 동영상은 중년의 어느 여자가 작은 푸들을 끌고 산책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길을 걷던 푸들이 볼일을 보자 여자는 주머니 안에서 꺼낸 비닐봉지에 손을 넣어 변을 그 안에 넣었다. 우리 집 앞에 놓여있던 것과 똑같은 파란 비닐봉지였다. 그리고 봉지를 드라이브 웨이에 던져두고 유유히 길을 떠나는 모습이 잡혔다. 7초짜리 영상은 내가 그동안 알고 싶어 했던 사연을 고스란히 담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난 이 여자와 대화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 상냥하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사람처럼 보였는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역시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개똥 개똥 주인 동네 산책 드라이브 웨이

2023.02.0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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