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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우리에게 필요한 친구와 동지

얼마 전 한국 출장 중에 1.5세인 한인 교수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방학을 이용해서 서울에 연구차 나와 있는데, 혹시 한국에 있다면 청계천 산책로에서 만나 ‘치맥’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와는 몇 년 전 한국에 대한 어떤 연구 과제를 계기로 알게 되었다. 그는 의학계나 한인 단체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진지하고 겸손한 성품의 학자다. 내가 그의 부모님과 연령대가 비슷한 것 같아  편히 대화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는 내 딸들과 비슷한 또래다. 이민 1세대와 그 자녀 사이의 견해차로 쉽게 생길 수 있는 갈등을 소재로 즐겁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한국 출장 일정은 청계천 치맥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빡빡해 섭섭했다.     출장 일정을 마친 후 간신히 하루를 비워서 어릴 적 친구들과 전라남도 땅끝마을을 다녀왔다. 한국에 3000개가 넘는 섬들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사수했던 남해이다. 수려한 곳이었다.     흔히 한국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표현한다. ‘리’는 과거 거리의 단위로 마을과 마을 사이 약 400미터, 360보 정도라고 태종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땅끝마을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가 2000리여서 삼천리라고 한다.   한 나라의 영토에는 바다도 포함된다. 육지를 둘러싼 바다에서 여러 국가적 활동이 있을 수 있고, 이 영역 안에서 개발권, 무역권, 교통로, 국가 안보를 행사한다. 섬도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대륙 밖의 바다에 있는 땅인 섬들을 연결하는 선이 국가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섬들을 연결해서 그은 선(線) 안쪽의 12해리((海里: neutical mile)에서는 관세, 출입국 관리, 보건, 위생 등 국내법이 적용되어, 이를 접속수역으로 보면 된다. 그곳에서부터 200해리는 유엔이 규정한 배타적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으로 국가가 지원 탐사, 개발 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곳이다. 얼마 전에 한국 정부는 동해에서 원유 자원을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그곳이 한국 영토라 개발이 가능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캠페인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어떤 네티즌이 ‘그까짓 조그만 섬 갖고, 왜?’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영토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친구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삼천리 금수강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고 노력했다. 휴전선 인근 통일전망대에서는 오두산 너머, 우리가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함께 바라보았다. 한 친구는 전쟁기념관 동판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삼촌의 이름을 열심히 찾았다. 내가 6·25전쟁 때 전사한 큰오빠 이름을 찾았듯이…. 우리의 우정은  때때로 서로를 응원하는 문자로, 전자우편으로, 전화로 배달될 것이다.     여행을 함께 했던 이들은 10대 초반에 만난 친구들이다. 하지만 나는 치맥을 하자던 젊은 교수도, 이번에 한국에서 함께 활동한 젊은이들도 친구로 생각한다. 내가 영역 없이 넘나들며 쓰는 ‘친구’라는 말에는 ‘동지’와 ‘벗’이라는 뜻이 함께한다. 어려서 썼던 ‘동무’라는 따뜻한 말이 쓰이지 않는지 꽤 오래되었고 ‘동지’ 또한 이념의 색이 칠해진 단어가 됐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 이런 점에서는 편하다. 친구라면 ‘프랜드’ 또는 ‘베스트 프랜드’ 정도로 표현하니 말이다.   퓨 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과반수는 한 명에서 네 명 정도의 친구가 있다고 한다.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비율도 8%나 된다. 성별에 따라, 인종과 민족성에 따라 친구의 분포도(分布圖)도 다르게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정서적 안전지대는 동족, 동성, 동향, 동문 등 ‘같은 어떤 것’에 있는 것 같다. 같은 인종끼리의 만남이 더 편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주변의 누구도 친구 없는 8%에 속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특히 이민 사회인 한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일이다. 류 모니카 /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친구 동지 한국 출장 전라남도 땅끝마을 한국 정부

2024.08.0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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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개고생 동지들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새 문화원 개관식에서 한때 나와 같은 처지의 화가 부인을 만났다.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우리 내일 우보경 개인전에 가서 응원하자.”     오랜 인연을 이어오는 화가 부인들의 남편들은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온 선후배 관계다. 아트 졸업장으로는 직장 잡기 힘들다. 마약을 끊지 못하듯 작업하기를 고집하는 화가 남편을 둔 와이프들은 집안 경제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보경 작가를 그녀의 남편 대학원 졸업 전시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싱그럽고 수줍은 싱글들이었다. “목소리 한번 들어봅시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는 말이 없었다. 내가 말이 없었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 나는 정말 그랬다. 화가와 결혼하면 고생길이 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뭐에 씌었는지, 철없는 우리는 겁도 없이 연애 시절부터 남편 될 남자들을 서포트했다.     우 동지(무슨 독립군 비밀 요원 호칭 같은)는 유학 생활 중, 어디서 그렇게 커다란 노란 양은 냄비를 구했는지 냄비 가득 푹 익은 무를 넣은 오뎅과 음식을 만들어 와서 연인(훗날 남편인 화가 최성호) 오프닝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가난한 유학 시절 그 오뎅이 어찌나 맛있던지! 우 동지도 프랫 대학 학부와 대학원 졸업은 했지만, 결혼하자마자 생계를 위해 붓을 놓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모두 다 접고 작업에 몰두하며 뉴저지 포트리, ‘패리스 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다.     온 심혈을 기울인 작품에서 영혼이 깨어나 지난 힘든 날을 속삭이듯 커피 필터(커피 내리고 난) 바탕 위에서 살아난다. 능숙하면서도 절제된 작가의 손놀림은 장단에 맞춰 춤추듯 강하면서도 은은한 색과 선이 감각적으로 피어난다. 기막힌 묘사력은 빛바랜 민화를 싱싱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부활시킨다. 작품이 팔렸다는 붉은 신호가 곳곳에 반짝였다. 도대체 얼마 만인가? 브루클린 창고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올해로 정확히 40년 만이다.     “오셨어요. 코트 벗으세요. 걸어드릴게요.”   전시회에 맞춰 평상복 검은 치마 위에 초록색 한복 윗저고리를 입은 갤러리 운영자인 고수정 씨가 나를 반긴다.   “개고생 동지 개인전에 오지 않을 수 없지요.”   “저도 개고생해요.”   “자기 남편은 화가도 아니잖아요.”   “화가 친구를 뒀기에. 하하하.”   그녀 말에 백배 공감한다. 화가 남편을 둔 부인도, 화가 부인을 둔 남편도, 화가 주위의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가 개고생이다. 이수임 화가·맨해튼글마당 개고생 동지 개고생 동지들 화가 남편 남편 대학원

2024.03.22.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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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동지 팥죽

고향에서 동짓날 팥죽을 먹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에 숟가락을 훅훅 불어 뜨끈뜨끈한 팥죽을 먹으며 새알심을 씹는 맛은 별미였다. 동짓날 외에 팥죽을 먹는 날이 또 있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품앗이로 초상집에 팥죽 또는 녹두죽을 한 동이 만들어다 준다. 슬픔에 잠기고 곡을 해 목이 갈라진 유가족들에게 죽을 먹도록 배려하는 풍습이 그 고장에 있었다.   지난 12월 22일이 동지였다. 한국에는 액땜을 위해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식부(食夫)인 나도 팥죽을 만들어보았다. 우선 팥을 사 와야 했다. 마켓에 가 살펴보니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중국산은 있는데 한국산은 없었다. 팥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귀한 곡물이다. 일본에서 나무 박스에 담은 찹쌀 팥밥은 좋은 선물이다.   월남 전 북한에 살 때 어느 해 어머니가 텃밭에 팥을 심었다. 풍작이어서 세 가마니를 수확했다. 악질 노동당 세포 위원장이 수확하기 전 실태조사를 임의로 하여 두 가마니를 현물세로 납부해야 했다. 세포 위원장이 본인 실적을 올리기 위해 수확량을 부풀린 것이다. 어머니의 하소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생산하는 팥의 양은 국내 시장에도 공급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래서 중국산이 많다고 한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중국산도 알맹이가 크고 반들반들 기름지고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녹두알처럼 작은 캐나다산을 집어왔다. 미국산은 전에도 먹어보았지만 유전자 변형을 해서 그런지 팥이 아니고 콩에 가깝다.   세 컵의 팥을 잠깐 끓이다가 국물을 따라버렸다. 그리고 불순물을 제거한 후 양파 한 개를 넣고 다시 끓였다. 히스패닉 친구에게서 전해 들은 방귀를 덜 나오게 하는 비법이다. 양파를 걷어내고 팥을 주걱으로 으깼다. 죽이 거의 될 때 찹쌀가루로 만든 새알심과 오트밀 두 컵을 넣고 끓였다. 설탕 대신 트루비아를 사용했다.     맛을 보았다. 하지만 기대한 맛이 아니다. 구수한 맛이 덜하다. 왜 그럴까. 우선 어머니가 만들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맛과 사랑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산 즉 신토불이(身土不二) 팥이 아니다. 신토불이란 ‘한국에서 생산된 농작물이 한국 사람의 체질 즉 입맛에 맞는다’ 는 말이다.     신토불이가 점점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도토리묵을 만들기 위해 도토리 가루를 사기 위해 마켓에 갔으나 한국산은 없었다. 한 군데서 한국산을 발견했으나 값이 비쌌다. 한국의 산은 모두 도토리나무로 덮여있는데, 그 도토리를 왜 수확하지 못하는가 갸우뚱하게 된다.     요즘 입맛도 없고 맛있는 음식도 없다. 노화 현상이다.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신토불이 팥죽을 생각하며 내가 만든 캐나다산 팥죽을 아침으로 먹고 있다. 내 변덕이 바뀔 때까지 팥죽을 먹을 것이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이 아침에 동지 팥죽 동지 팥죽 캐나다산 팥죽 신토불이 팥죽

2022.12.2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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