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이 하루가 가네 / 어디쯤엔가 멈춰 설 초침처럼 / 길 아닌 길을 만들며 가지 / 안간힘의 별빛은 견디어내다 /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네 // 어찌할지 모르는 발걸음 / 다정한 풍경과 감싸오는 바람 / 왼쪽 가슴을 누르며 가네 / 파도가 밀려오고 모래는 쓸리고 / 말 못 한 수천 마디 대답이 / 밤하늘 별처럼 가슴에 박혀오네 // 바다가 보고 싶어 / 밀려오는 파도가 벌써 그리워지네 / 모래 위 물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숨결 / 눈을 감고 허우적대는 나는 어느 말로도 부끄러워 뜬 밤을 새우네 // 눈을 감으면 어느새 앞서 보이고 / 바다로 가는 언덕길은 저만치 서 있네 / 끝없이 펼쳐질 바다, 파도 소리, 짠 내음 / 길섶에 흔들리는 갈대를 가르며 가네 / 옆으로 누운 베개 밑으로 물살이 잠겨오네 썰물처럼 깊은 바닷속에 잠기네 무엇엔가 몰두하려고 애를 쓰네. 괜스레 호미를 들고 구석에 흙을 고르고 있네. 가을이 나뭇가지에 앉아 부질없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네. 주말엔 행사도 있고 작은 모임도 있지만 내키지 않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만 보내. 있어야 할 사람이 그곳에 없을 때, 보여야 할 풍경이 희미해질 때,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길 아닌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당혹감이 엄습해 오네. 모든 일들이 부질없어 손에서 떠나가네. 내가 있는 곳에서 당신의 곳까지, 그리고 내가 보았던 굳이 기쁨이라 표현할 수 있는 비밀의 정원에서부터 모래언덕으로 이어지는 바다로 가는 둔덕까지, 가꾸지 않아도 때와 시간을 맞춰 피어나는 들꽃들의 청초한 모습이, 보내주었던 견딜 수 없는 경이로움이 마음을 채우고 있네. 나비도 지쳐 날지 못해 거친 숨 내쉴 때 작은 들꽃처럼 나에게 왔지. 첫 발자국부터 마지막 걸음의 거리를 남겨두고라도 길을 잃은 적이 없네. 머릿속 각인된 길을 실제의 희미한 길보다 더 당당히 걸었지. 그곳을 걷다 보면 마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 했지. 들꽃 하나 지면 다른 꽃 하나 피어났지. 설레임으로 시작된 그대와의 만남 하늘가로 뻗은 가지 끝 가을이 가까이 와 묻었네 그대를 그리워함으로 산이 되어 숲을 품고 굽은 언덕의 긴 등성을 사랑하게 되었지 쓸어주고 어루만지는 바람으로 살기 위해 흐르는 별자리 그리다 길을 찾기도 하였네 고추잠자리 몸을 세워 바람에 날개를 맡기듯 내 한 몸 붉게 태워도 좋으리 눈가에 물들어 오는 가을로 살아도 좋으리 물방울 출렁이네 이리저리 부서져도 소멸되지 않는 기억 그대 세상에 단 한 사람 썰물처럼 바라만 보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들꽃 하나 왼쪽 가슴 시인 화가
2025.09.15. 12:40
종일 구부려 일하다 네가 생각나 잔뜩 엎드린 너를 보려고 나도 잔뜩 엎드려 본다 너의 걸음과 나의 걸음의 행간 가까운 듯하였는데 여전히 멀어 네 소리가 듣고 싶어 네 옆에 산다 소음과 발길이 끊어진 들녘 바람에 스치는 소리 들리고 나는 너를 보고 있다 하늘이 호수를 내려다보듯 어느새 웃고 있는 너의 모습 온 세상 사람이 웃어도 너의 웃음만 내게 들린다 고개 든 날보다 고개 숙인 날이 좋아 온종일 너를 향해 고개 숙인다 엎드린 네가 아프면 어쩌나 네 모습 자세히 보려고 기억 사라지지 않게 자꾸만 본다 습관처럼 고개 드는 것보다 고개 숙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것들이 보이고 그들에게 애착이 간다. 때론 활짝 핀 꽃보다 꽃을 피우고 난 후 고개 숙인 들꽃이 더 아름답다. 사람의 인적이 끊긴 나지막한 들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들꽃. 화려하지 않고 탐스럽지도 않지만 다소곳이 피고 난 후 낮게 엎드린 모습에 나의 시선도 자꾸 너처럼 낮아진다. 언제 자랐는지 키를 키운 갈대 사이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부끄럽게 숨겨져 있다. 갈대숲을 헤치며 다가가면 부끄러워 고개 돌린다. 그렇듯 들꽃 한 송이를 발견하면 내 안의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나는 별빛이 몰려와 어느새 나는 푸른 밤하늘이 된다. 너는 꼭 다른 행성의 별들이 떨어져 피운 다섯 모서리의 작은 별 조각 같다.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별빛 같다. 내 손에 너를 감싸면 조그만 네 얼굴엔 홍조가 띤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너는 가을 들꽃이다. 더위를 물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마른 풀밭에 생기가 돈다. 어디서 날아와 풀이 되었나? 무엇이 그리워 들꽃이 되었나? 꽃이 피고 또 질 때면 숲의 모든 눈들은 풀꽃을 본다. 숲의 모든 귀들은 작은 꽃들의 나직한 속삭임을 듣는다. 누구의 손이 스쳐 간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숲속 모두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쓴다. 지켜주고 안아주는 숲의 사랑을 느낀다. “조금만 더 견디어 내. 이제 하늘의 선물이 갈증 난 네 목을 적셔줄 테니까” 숲의 가슴은 넓고 포근하여 가을 길을 예비하는 단비를 맞이한다. 아주 작은 들꽃 하나에도 하늘의 선물은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 가을 들녘에 생기가 돈다. 서로에게 기대어 들꽃 한 송이 피어난다. 바쁜 하루가 지나간다. 종일 구부려 일하다 네가 보고 싶어 너에게 간다. 어느 들, 어느 모퉁이에 구부려 핀 너는 밀려오는 파도의 잔상을 기억해 내고, 그 안에 아직 남겨져 있는 더운 숨을 느낀다. 기억의 순간 참지 못하고 오열하는 눈물을 본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침묵의 바다로부터, 무념의 숲으로부터. 바람에 스쳐 흔들리는 갈대 사진을 동봉해서 함께 피어난다. 가을이여 가을 들꽃이여 간절하면 보인다 지나쳤는데 간절하면 들린다 무심했는데 간절한 시간, 간절한 마음에 네 목소리가 들리고, 네가 보인다 나의 그리운 이여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가을 들꽃 가을 들꽃 가을 들녘 들꽃 하나
2024.09.23.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