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버질 거리에서 희망을 읽다
LA에 사는 한인들 가운데 버질 거리(Virgil Avenue)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LA 코리아타운을 가로지르는 윌셔 거리에서 시작해 병원과 한국 식당, 여러 한인 교회들이 자리한 익숙한 길이다. 일상의 동선이자 생활의 일부가 된 거리다. 버질 거리는 1886년 LA의 도시 개발사에 처음 등장한다. 부동산 업자였던 조지와 클라라 샤토(George and Clara Shatto) 부부, 그리고 존 말트먼(John S. Mattman)이 자신들의 토지 15에이커를 당시 LA 대학교(Los Angeles University)에 기부하면서 서쪽 지경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거리들이 만들어졌고, 커먼웰스(Commonwealth), 마이애미(현 웨스트모어랜드), 그리고 버질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탄생했다. 다만 누가, 어떤 의도로 ‘버질’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버질은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이자 건국 서사시를 남긴 베르길리우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그의 로마식 정식 이름은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Publius Vergilius Maro). 그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 초기, 문학과 정치가 긴밀히 맞물려 있던 시대를 살았다. 후대에 ‘로마의 시성(詩聖)’으로 추앙받았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으며 로마의 국가적 자부심을 담은 대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를 남겼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안데스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아들의 재능을 믿었던 아버지는 성인식을 치른 뒤 그를 지방 대도시로 유학 보내 수사학을 공부하게 했다. 이후 로마로 옮겨 당시 유망주였던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함께 수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웅변가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카타렙톤』을 통해 시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호라티우스 등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인의 길로 방향을 확고히 했다. 기원전 29년 『농경가』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고, 『아이네이스』로 로마 문학의 정점에 올랐다.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건국 신화를 노래한 서사시다. 그리스 문학에서 호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차지하는 위치에 버금가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모든 시인의 영광이자 빛”이라 부르며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고, 밀턴은 그를 넘어야 할 거대한 문학적 산으로 인식하며 『실낙원』을 집필했다. T.S. 엘리엇은 베르길리우스를 “유럽의 시인”이라 칭했고, 빅토르 위고 역시 그를 호머와 동급의 ‘영혼의 시인’으로 평가했다. 미국 곳곳에는 베르길리우스의 이름을 딴 거리와 마을이 남아 있다. LA의 버질 거리와 버질 빌리지(Virgil Village)를 비롯해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버질 스트리트, 사우스다코다와 뉴욕주의 버질 타운 등이 그렇다. 사우스다코다의 경우 라틴어식 ‘Vergilius’를 그대로 쓰고, 캘리포니아 캐스트로 밸리에는 ‘Vergil Street’라는 표기가 사용된다. 영어권에서도 Virgil과 Vergil이 공존하는 점은 흥미롭다. 『아이네이스』는 베르길리우스의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기원전 19년,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충분히 다듬지 못했다며 원고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문학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공개와 출판을 명령하면서 이 작품은 세상에 남게 되었다. 서사시는 트로이 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트로이가 함락된 뒤, 베누스의 아들 아이네이스는 신들의 예언에 따라 더 위대한 나라를 세우라는 사명을 받고 고난의 여정을 떠난다. 수많은 시련 끝에 이탈리아 땅에 도착해 로마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로마 시민이 지녀야 할 덕목,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가치를 노래했다. 아이네이스에게 주어진 신탁이 ‘로마 건국’이었다면, 베르길리우스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은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버질 거리를 오간다. 병원과 식당, 교회가 늘어선 이 길 위에서 로마의 시인이 남긴 희망의 서사를 떠올린다.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했던 것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버질 거리를 지나며, 희망의 노래로 새해를 시작한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거리 희망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로마 문학 로마식 정식
2026.01.07.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