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타운 남쪽 10번 프리웨이와 연결되는 주요 도로 가운데 하나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불러바드(Martin Luther King Jr. Blvd, 이하 MLK Blvd)다. 이 도로는 서쪽 끝이 볼드윈 빌리지 지역의 오바마 불러바드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사우스 알라메다 스트리트까지 이어진다. 현재는 LA 남부를 관통하는 간선도로로 기능하지만, 이 길이 지금의 이름을 갖기까지는 긴 역사가 있다. 이 도로의 원래 이름은 샌타바버러 애비뉴(Santa Barbara Avenue)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00년 이전에는 ‘40번 도로’로 불렸으며, 당시에는 버몬트 애비뉴와 연결되는 비교적 작은 도로 중 하나였다. 이 도로명이 바뀐 계기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LA 시의회는 1982년부터 도로명 변경을 추진했고, 이듬해인 1983년 1월 15일, 킹 목사의 54번째 생일을 맞아 공식적으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불러바드로 개명했다. 당시 시의원 로버트 C. 패럴이 개명 작업을 주도했는데 시민 반대가 적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이었다. 새 도로 표지판 정비 등으로 약 6만4000달러가 필요하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그럼에도 LA시는 흑인 커뮤니티의 역사적 중심축이었던 이 도로에 킹 목사의 이름을 붙이는 결정을 내렸다.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옳지 않은 일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3대째 이어진 목사 가정의 영향 속에서 그는 신학과 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첫 전환점은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몽고메리는 미국 내에서도 인종차별이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 여사의 버스 좌석 거부 사건이다. 로자 파크스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이 사건은 곧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확산됐다. 킹 목사는 이미 그해 여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회의에서 로자 파크스를 만난 인연이 있었다. 당시 그는 초청 강사였고, 로자 파크스는 협회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은 무려 381일간 이어졌다. 당시 몽고메리의 법은 버스 좌석을 백인석과 흑인석으로 나누고, 공용석에 앉은 흑인도 백인이 요구하면 자리를 양보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흑인은 요금을 앞문에서 낸 뒤 다시 내려 뒷문으로 타야 했고, 운전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했다. 이 부당한 제도에 처음으로 집단적 저항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 운동이었다. 젊은 목사 킹은 비폭력 저항 원칙 아래 이 운동을 이끌었고,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중교통에서의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자 파크스는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마틴 루터 킹은 전국적인 지도자로 떠올랐다. 킹 목사는 학문적으로도 탁월했다. 15세에 모어하우스 대학에 조기 입학해 사회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크로저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후 보스턴대에서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과정에서 평생의 동반자인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1960년 애틀랜타로 돌아와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아버지와 공동 목회를 이어갔으며, 전국 각지에서 인권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1963년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이 과정에서 옥중에서 쓴 공개서한은 그의 비폭력 저항 철학을 집약한 문서로 평가받는다. ‘지연된 정의는 거부된 정의(Justice too long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문장은 지금도 자주 인용된다. 같은 해 워싱턴 대행진에서 발표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은 미국 인권운동의 정점으로 남았다. 이어 1965년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이어진 투표권 행진은 투표권법 제정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써 미국의 법적 인종차별 시스템은 사실상 해체됐다. 그는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말년에는 빈곤 문제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앞장섰다. 사생활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실천은 그 모든 평가를 압도한다. 오늘날 그는 세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해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 있다. 미국은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지정해 그의 정신을 기린다. 미국 전역에는 수많은 기념관과 도서관, 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1000개가 넘는 도로와 고속도로가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필자가 방문한 여러 도시에서도 어김없이 마틴 루터 킹의 이름을 딴 길을 만날 수 있었다. LA의 MLK 불러바드도 그 긴 역사와 기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이름 길이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로자 파크스 당시 몽고메리
2026.01.15. 19:32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한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42세의 흑인 로자 파크스가 퇴근후 버스에 올라 백인석을 지나 공용석인 11번째 좌석에 앉았다. 운행중 백인석이 손님으로 가득하자 운전수 제임스 블레이크가 파크스가 앉은 좌석에 다가와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한다. 다른 흑인 여성 셋은 일어섰지만 파크스는 ‘일어서야 할 이유’가 없다며 거부한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해 잡아가게 하는 수 밖에 없다’며 블레이크가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체포되어 끌려 나갔다. 이에 흑인교회 및 WPC(Women‘s Political Council WPC) 등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흑인여성이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생겼다’며 ‘재판이 열리는 월요일, 모든 시민은 항의의 뜻으로 버스 보이콧을 하자’는 전단지를 살포하며 주민을 독려한다. 12월 5일 재판에서 로자 파크스는 벌금 10달러 , 비용 4달러를 합한 14달러의 폭탄선고를 받고 항소하는 한편 흑인사회는 ‘몽고메리 진보연합’을 결성한 뒤 무명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회장으로 선임, 무려 382일동안 무저항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어간다. 이에 FBI 후버국장은 킹 목사에 대해 ’흠집을 낼만한 정보를 찾으라‘는 내사지시를 내렸고 지방정부나 수사당국은 흑인에게 택시를 제공하는 운전수는 해고, 택시회사에는 보험금 지불을 거부케 보험회사를 압박하는 등 이제는 전국적인 흑백 인권투쟁으로 번져나갔다. 1년 뒤인 1956년 12월 2일, 연방지법과 대법원이 ‘인종차별 및 분리행위’가 위헌이라 판결하며 백인에게 백기를 안겼지만 들불같이 번진 검은 열풍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역사는 로자 파크스를 1950년대 반공열풍 ‘매카시즘’의 조지프 매카시와 함께 미국을 변화시킨 주역에 이어 20세기 주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92세 사망 때는 연방의사당 로툰다홀에 관이 이틀씩이나 안치되는 미 역사상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하였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해 미국은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국민이 나라의 주인됨을 만천하에 천명한 뒤 1865년에는 수정헌법 13조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하므로 명실상부 세상에서 가장 자유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섰다. 그러나 내실은 백인독재국이었다. 로자 파크스가 살았던 당시, 남부는 기차, 학교, 병원, 음식점, 호텔, 미장원, 극장, 수돗가, 교회, 신문부고란, 장례식장에서까지 흑·백인이 분리되었고 야간에는 KKK가 행진을 하며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교회나 목사들에게 폭탄을 투하, 킹목사가 시무하던 교회도 3명의 성가대원이 사망하였는가 하면 목사관을 향한 폭탄테러도 자행되었다. 더욱이 1896년 연방대법원이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켜도 좋다는 분리 평등 (Separate but Equal)”을 통해 평등은 있으나 끼리끼리라는 악한 판결로 인해 더욱 노골화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다는 창조 질서를 거슬리는 궤변이자 자유와 평등, 신앙을 찾아 이땅에 건너온 청교도의 건국정신조차 부인한 이율배반으로 지금도 만연한 흑백분란의 단초 중 하나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파크스 용기 로자 파크스 흑인 로자 투하 킹목사
2023.07.21.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