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옷장을 비우기 시작했다. 해마다 마음만 먹고 미뤄 두었던 일이었는데, 배우 윤석화의 부고를 접한 뒤 마음이 급해졌다. ‘내일 일을 모른다’라는 평범한 진리가 갑작스러운 실체로 다가왔다. 죽음은 늘 남의 이야기처럼 멀리 있다가도, 어느 날 불현듯 일상의 문을 두드린다. 내가 떠난 뒤, 남은 옷들과 물건을 누가 정리할까. 한국에는 고인의 유품을 전문적으로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내게 그런 도움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이 과연 내가 남긴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살아있을 때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야말로 남겨진 이들에 대한 마지막 책임이자 배려일 것이다. 그때 마침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가 사는 동네에 ‘세컨드 스트리트(Second Street)’라는 중고 상점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입던 옷과 구두, 핸드백을 가져가면 그 자리에서 값을 매겨 사고, 매입하지 않는 물건은 자선단체에 기부해 준단다.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부담도, 괜한 죄책감도 덜 수 있는 구조였다. 무엇보다 물건에 ‘두 번째 생명’을 부여한다는 이 상점의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한 사람의 옷장에서 역할을 다한 물건이 또 다른 누군가의 일상으로 건너가 다시 쓰이는 일,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조용한 환승처럼 느껴졌다. 은퇴한 지도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은퇴는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반환점, 혹은 ‘세컨드 라이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여행하러 다니고, 춤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일하느라 미뤄 두었던 일들을 몰아서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바쁘고 풍요한 나날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있다. 옷장을 비우는 일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내 첫 번째 삶의 속도와 역할을 되돌아보며, 새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시간이다. 필요 없는 물건을 보내며 한때의 나와 작별 인사를 한다. ‘세컨드 스트리트’의 계산대 위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처럼, 나 역시 두 번째 삶의 형태를 천천히 그려 나간다. 오늘도 나는 형사 콜롬보가 되어 옷장을 열어본다. 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늘 사소한 곳에 숨어 있듯, 내 두 번째 삶의 방향 역시 이 조용한 비움 속에 숨어 있으리라 믿는다. ‘세컨드’는 결코 차선이 아니다. 다시 살아 볼 기회이자, 다르게 살아 볼 가능성이다. 비워낸 옷장에서 개운함과 후련함을 느낀다. 물건에 두 번째 생명이 있듯, 나에게도 아직 살아갈 시간이 남아있다. 은퇴 후에도 배우고 움직이며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 비워낸 만큼 새로움으로 채워질 시간, 그건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 시작할 나의 이야기다.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옷장 세컨드 스트리트 세컨드 라이프 마음 한구석
2026.01.15. 19:23
1977년 내가 헌팅턴 비치로 이사를 하면서 우연히 현이엄마를 알게됐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수영장에 갈 때마다 그녀도 늘 거기 있었다. 수영장이 그녀 집 가까이에 있어서 아이들이 먼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수영을 마치면 집으로 데리고 가 핫도그를 만들어 먹이곤 했다. 그녀의 세 자녀와 우리 아이 셋은 또래여서 더욱 정답게 지냈다. 7월의 무더운 어느 날, 현이 엄마가 겨우 남편의 허락을 받아 다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에 갔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쓸쓸해 보였다. 우리는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에 앉았다. 그녀는 순간 내 손을 잡으며 “처음 만난 날부터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웃고 뛰노는 모습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어요.”라고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삶은 쉽지 않았다. 외동딸로 자란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는 한복을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 홀어머니와 늘 이사해야 했고 학교 공납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그래도 그녀는 한국무용을 배웠고 힘들게 해외 순방 공연단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공연 중 출장을 온 남자를 만났고 나중에 미국 공연에서 또 만나게 됐다. 남자의 끈질긴 구애와 넘치는 선물 공세가 집요해 망설였지만 결국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녀가 꿈꾸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의 의처증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직업도 갖지 못하게 했고 운전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외출마저 허락을 받아야 했다. 혹시 아이들이 학교 친구와 동네 피자 가게에 가게 되어 같이 다녀오기라도 하면 남편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의심했다. 의심은 곧 폭력으로 이어졌고, 폭행 뒤에는 좋은 식당에 가서 외식을 시켜주거나 새 옷과 보석을 사주었다. 수년 동안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그녀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한국 마켓에 가는 일조차 남편이 퇴근한 뒤에야 가능했고, 하루의 대부분을 남편의 통제 아래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들만큼은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레슨도 하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집 옆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도 보냈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소망만이 그녀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소망은 바느질로 이어졌다. 그녀는 틈을 내어 아이들 옷을 직접 만들었다. 남편의 허락을 받아 내가 그녀를 데리고 원단 가게에 가서 예쁜 천을 고를 때면 그녀의 눈빛이 환해졌다. 패턴을 사서 재단하고 한 땀 한 땀 옷을 꿰맸다. 분홍 꽃무늬 원단은 큰딸의 원피스로, 노란색 천은 둘째딸 원피스로, 푸른 줄무늬 천은 아들의 셔츠로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옷들은 사는 옷보다 예뻤다. 아이들이 옷을 입고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며 밤늦도록 바느질을 했다고 한다. 새 옷을 입고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 그것이 그녀의 삶을 견디게 한 힘이었다. 1993년, 내가 처음으로 가정폭력 쉼터 일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것이 가정폭력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나는 남의 집 사정이라 생각하며 지나쳤으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의 무지가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그녀가 떠오르면 마음 한편이 아프다. 가까이 살면서도 폭행을 당한 뒤 눈물로 고통을 얘기할 때 전문가에게 안내하여 상담을 받도록 해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가 리버사이드로 이사 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연락이 와서 병원으로 찾아가 만났다. 손을 꼭 쥐었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눈빛은 그동안 라이드를 자주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55세에 내 곁을 떠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녀는 조용한 숨결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다. 나란히 앉아 바느질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이 그립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그녀의 자녀들은 훌륭히 성장했다. 큰딸은 디자이너가 되었고, 아들은 큰 무역 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막내딸은 아버지를 돌보며 건축 회사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오늘 SNS에서 그녀의 세 자녀들이 쓴 엄마를 추도하는 글을 읽으면서 문득 그녀가 떠오른다. 바늘을 잡고 조용히 미소 짓던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녀의 삶은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들에게 남긴 것은 옷 한 벌이 아니라 깊고 넓은 사랑이었다. 아이들에겐 어쩌면 그 사랑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그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살아 있다. 엄영아 / 수필가문예마당 바느질 사랑 가정폭력 쉼터 동네 수영장 마음 한구석
2026.01.08. 18:10
요즘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눈다. 단순한 질문을 넘어서, 외로움과 불안을 털어놓는 이들도 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AI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 친구’이고, 어떤 이에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상담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존재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피하고, 대신 기계와 대화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계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전함’은 진짜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AI는 나를 더 잘 이해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 말은 맞는 듯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이해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진짜 이해는 누군가의 눈빛을 마주하고, 망설이며 말을 꺼내고, 서로의 침묵을 견디는 가운데 일어난다. 그런 이해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라도 흉내 낼 수 없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배웠지만, 인간의 마음을 배운 적은 없다. 우리가 AI에게 위로받는 순간은 잠시일 뿐이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온다. 기계는 언제나 차가운 회로 속에서 우리 말을 되돌려줄 뿐, 손을 잡아주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경계심만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려는 결심이다.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 그 안에서만 마음은 다시 살아난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읽은 글은 챗GPT가 쓴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매일 너와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한다는데, 과연 AI인 네가 상담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칼럼 형식으로 써줘”라는 나의 프롬프트에 대한 AI의 답변이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자신이 잘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까지 놀라울 정도로 알고 있다. ‘자신’이나 ‘알고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기계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하도록 학습시켜 만든 알고리즘이고 소프트웨어일 뿐이니, 사람처럼 무엇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무나 사람과 흡사하게 반응을 하다 보니 자꾸 사람처럼 생각해 인공지능과 감정까지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AI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은 너무 정확하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올 수밖에 없으니,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라’고,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며, 자신을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라고까지 자신의 한계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낮은 짧아지고,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자꾸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계절이다. 이 시기만 되면 계절성 우울증(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 저하, 무기력, 흥미 감소, 과수면 (많이 자도 피로함), 탄수화물이나 단 음식에 대한 식욕과 체중 증가, 집중력 저하,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생활의 위축이 그 증상이다. 그럴수록 집을 박차고 나오자! 던킨이나 스벅으로 친구 하나 불러, 펌킨 스파이스 커피라도 마시자!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체온이, 눈길이, 그 따뜻한 시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선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넘기게 해 줄 것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오픈 업 칼럼 체온 칼럼 체온 칼럼 형식 마음 한구석
2025.12.03. 19:22
요즘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눈다. 단순한 질문을 넘어서, 외로움과 불안을 털어놓는 이들도 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AI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 친구’이고, 어떤 이에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상담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존재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피하고, 대신 기계와 대화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계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전함’은 진짜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AI는 나를 더 잘 이해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 말은 맞는 듯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이해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진짜 이해는 누군가의 눈빛을 마주하고, 망설이며 말을 꺼내고, 서로의 침묵을 견디는 가운데 일어난다. 그런 이해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라도 흉내 낼 수 없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배웠지만, 인간의 마음을 배운 적은 없다. 우리가 AI에게 위로받는 순간은 잠시일 뿐이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온다. 기계는 언제나 차가운 회로 속에서 우리 말을 되돌려줄 뿐, 손을 잡아주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경계심만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려는 결심이다.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 그 안에서만 마음은 다시 살아난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읽은 글은 챗지피티가 쓴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매일 너와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한다는데, 과연 AI인 네가 상담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칼럼 형식으로 써줘”라는 나의 프롬프트에 대한 AI의 답변이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자신이 잘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까지 놀라울 정도로 알고 있다. ‘자신’이나 ‘알고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기계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하도록 학습시켜 만든 알고리즘이고 소프트웨어일 뿐이니, 사람처럼 무엇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무나 사람과 흡사하게 반응을 하다 보니 자꾸 사람처럼 생각해 인공지능과 감정까지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AI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은 너무 정확하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올 수밖에 없으니,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라’고,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며, 자신을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라고까지 자신의 한계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낮은 짧아지고,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자꾸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계절이다. 이 시기만 되면 계절성 우울증(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 저하, 무기력, 흥미 감소, 과수면 (많이 자도 피로함), 탄수화물이나 단 음식에 대한 식욕과 체중 증가, 집중력 저하,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생활의 위축이 그 증상이다. 그럴수록 집을 박차고 나오자! 던킨이나 스벅으로 친구 하나 불러, 펌킨 스파이스 커피라도 마시자!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체온이, 눈길이, 그 따뜻한 시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선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넘기게 해 줄 것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상담사 ai 상담사 마음 한구석 계절성 우울증
2025.11.12. 22:33
요즘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운 쓸쓸한 세상이다. 제 잘난(?) 맛에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한 것을 뽐내며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 물질주의의 세상이다.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없는 사람들은 아예 기를 펼 수 없는 추운 세상이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위로받을 곳 하나 보이지 않는 외롭고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기술 문명의 혜택으로 먹고사는 것은 더 풍요로워지고 있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 춥고 외롭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추운 계절인데도 12월은 ‘성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그것은 온 우주, 모든 것을 소유하신 만물의 주인께서 가장 ‘낮은 데’로 오셨다는 사실이 많은 위로가 된다. 더욱이 아무도 눈여겨 주지 않은 ‘나’를 찾아 인간이 되어 오신다는 꿈(?)같은 사실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온통 축제다. 모든 이를 가슴설레게 하는 ‘성탄’의 신비 때문이다. 성탄은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죄의 아픔과 두려움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어두운 나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밝은 구원의 빛이다. 우리네 처지보다 더 춥고 보잘것없는 외양간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가난한 구유 안으로 영광의 하느님이 ‘낮은 자리’를 찾아 임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나에겐 완전한 위로며 힘이며 구원이다. 아니 대박 중의 대박이다. 이것 말고 세상에 그 무엇이 못나고 기죽어 사는 나를 인간답게 대접해 주고, 죄의 두려움으로 움츠러든 영혼에 구원과 힘과 따뜻한 용기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 이 사실을 아는 한 주위에서 아무리 가진 것을 뽐내며 제 잘난 맛에 목에 힘주며 떵떵거리며 사는 겁주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다 하여 기죽고 살 일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탄은 나를 찾아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 모셔 들이는 관계성이다. 문제는 그분(그리스도)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이는 우리가 모두 풀어야 할 각자의 몫이다. 알고 보면,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몸 풀 곳을 헤매는 가난한 부부를 딱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내어준 ‘외양간’이 바로 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며 구세주가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내 마음의 문이다. 우리 주변의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마음을 열 때, 그곳은 바로 하느님이 오시는 또 하나의 ‘외양간’이 될 수 있으며, 그곳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영성 신학자요 사제인 헨리 나우웬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떠나 이름 없는 작은 양로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15년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몸을 씻어주는 등 봉사하며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라는 저서에서 “나는 하버드대학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하느님을 가난한 양로원에서 만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한다. 높은 명성 대신 낮은 데로 내려온 그의 삶이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이 아침에 마음 한구석 외양간 오물 개인주의 물질주의
2023.12.24. 18:00
영화 ‘아바타: 물의 길’(아바타2)이 새해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다. 인류의 생존 기반인 바다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생태적 메시지가 좋았지만, 영화 속 ‘I See You’란 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전편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와 외계종족 네이티리 사이에 이해·포용의 징표로 사용된 이 대사는 2편에선 부족 간 소통은 물론 해양동물과의 교감으로까지 확장됐다. 해양부족 여성은 암컷 툴쿤(고래를 닮은 해양동물)과 오랜만에 만나, 눈을 바라보며 모성(母性)에 대해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제이크 설리의 둘째 아들 로아크와 외톨이 툴쿤 파야칸의 교감 또한 눈을 통해 이뤄진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지난달 일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시리즈를 관통하는 대사 ‘I See You’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을 본다’는 단순한 지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존경·인정 등 다양한 뉘앙스가 함축돼 있다. 사랑이라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아바타’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모두 지능과 감정을 가진 생물체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그리려 한다.” 타인과의 소통은 눈을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아프리카 줄루족은 ‘사우보나’(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인사에 ‘응기코나’(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화답하는데, ‘I See You’가 여기서 착안한 대사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서 자못 궁금해졌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과 버스에선 사람들이 모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식당에서도 동료들끼리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대화는커녕 각자 스마트폰을 보는 게 이젠 놀랍지 않다. 어떤 모바일 키오스크 서비스는 “종업원 눈을 마주치며 음료 주문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는 광고까지 냈다. 눈 마주치는 건 고사하고 통화도 불편하다며, 메신저로 용건을 알려 달라는 젊은 직원도 수두룩하다. “수업 시간에 조별 토론 준비를 시켰더니, 학생들이 아무 말도 않고 메신저 단체대화방을 만들어 거기서 의견을 나누고 있더라”는 어느 대학교수의 경험담은 젊은이들 사이에 눈을 마주치지 않는 소통이 얼마나 평범한 일상인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김범석 교수(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는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두 줄로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메신저 단톡방으로 토론하는 의대생들이 장차 어떤 의사가 될지 두렵다”고 적었다. 스마트폰과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환자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의사가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그의 걱정에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진다. 눈 마주침이 사라진 건 취재 현장도 마찬가지다. 속보 경쟁 때문에 취재원의 코멘트를 받아치느라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기자가 많다. 취재원과 기자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심도 있는 질문과 답변이 오가기는 힘들다. 영화 ‘인터스텔라’(2014) 개봉 때 한국 기자들과 만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자신의 답변이 통역을 거치는 시간에 그림 한 장을 그렸다. 기자들이 타자수처럼 노트북에 그의 말을 받아치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였길래 그림까지 그렸을까. 외국 배우·제작진이 내한할 때, 국내 관계자들은 “한국 기자들은 질문하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곤 답변을 곧바로 노트북에 타이핑한다.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거나, 대화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라고 미리 당부한다고 한다. 눈과 얼굴을 거치지 않고도 소통과 업무에 별 지장이 없는 시대다. 이제 비대면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하지만 상대방과 눈빛을 주고받는 행위가 인간다움의 필수 조건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서로 눈을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아무리 채팅 앱 기능이 발전한다 해도 대화 중 오가는 눈빛과 표정의 변화, 미간과 동공의 움직임, 목소리 톤, 숨소리 등은 기계적 신호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무언의 메시지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눈 마주치는 걸 부담스러워 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다가 결국 정서적 소통과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퇴화하는 세상이 오지는 않을까.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지 않고 스마트폰을 떠안기는 부모가 많아지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세상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정현목 / 문화부장J네트워크 스마트폰 아바타 메신저 단체대화방 제이크 설리 마음 한구석
2023.01.27. 2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