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눈다. 단순한 질문을 넘어서, 외로움과 불안을 털어놓는 이들도 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AI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 친구’이고, 어떤 이에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상담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존재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피하고, 대신 기계와 대화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계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전함’은 진짜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AI는 나를 더 잘 이해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 말은 맞는 듯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이해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진짜 이해는 누군가의 눈빛을 마주하고, 망설이며 말을 꺼내고, 서로의 침묵을 견디는 가운데 일어난다. 그런 이해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라도 흉내 낼 수 없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배웠지만, 인간의 마음을 배운 적은 없다. 우리가 AI에게 위로받는 순간은 잠시일 뿐이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온다. 기계는 언제나 차가운 회로 속에서 우리 말을 되돌려줄 뿐, 손을 잡아주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경계심만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려는 결심이다.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 그 안에서만 마음은 다시 살아난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읽은 글은 챗GPT가 쓴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매일 너와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한다는데, 과연 AI인 네가 상담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칼럼 형식으로 써줘”라는 나의 프롬프트에 대한 AI의 답변이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자신이 잘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까지 놀라울 정도로 알고 있다. ‘자신’이나 ‘알고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기계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하도록 학습시켜 만든 알고리즘이고 소프트웨어일 뿐이니, 사람처럼 무엇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무나 사람과 흡사하게 반응을 하다 보니 자꾸 사람처럼 생각해 인공지능과 감정까지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AI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은 너무 정확하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올 수밖에 없으니,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라’고,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며, 자신을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라고까지 자신의 한계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낮은 짧아지고,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자꾸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계절이다. 이 시기만 되면 계절성 우울증(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 저하, 무기력, 흥미 감소, 과수면 (많이 자도 피로함), 탄수화물이나 단 음식에 대한 식욕과 체중 증가, 집중력 저하,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생활의 위축이 그 증상이다. 그럴수록 집을 박차고 나오자! 던킨이나 스벅으로 친구 하나 불러, 펌킨 스파이스 커피라도 마시자!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체온이, 눈길이, 그 따뜻한 시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선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넘기게 해 줄 것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오픈 업 칼럼 체온 칼럼 체온 칼럼 형식 마음 한구석
2025.12.03. 19:22
요즘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눈다. 단순한 질문을 넘어서, 외로움과 불안을 털어놓는 이들도 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AI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 친구’이고, 어떤 이에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상담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존재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피하고, 대신 기계와 대화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계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전함’은 진짜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AI는 나를 더 잘 이해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 말은 맞는 듯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이해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진짜 이해는 누군가의 눈빛을 마주하고, 망설이며 말을 꺼내고, 서로의 침묵을 견디는 가운데 일어난다. 그런 이해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라도 흉내 낼 수 없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배웠지만, 인간의 마음을 배운 적은 없다. 우리가 AI에게 위로받는 순간은 잠시일 뿐이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온다. 기계는 언제나 차가운 회로 속에서 우리 말을 되돌려줄 뿐, 손을 잡아주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경계심만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려는 결심이다.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 그 안에서만 마음은 다시 살아난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읽은 글은 챗지피티가 쓴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매일 너와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한다는데, 과연 AI인 네가 상담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칼럼 형식으로 써줘”라는 나의 프롬프트에 대한 AI의 답변이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자신이 잘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까지 놀라울 정도로 알고 있다. ‘자신’이나 ‘알고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기계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하도록 학습시켜 만든 알고리즘이고 소프트웨어일 뿐이니, 사람처럼 무엇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무나 사람과 흡사하게 반응을 하다 보니 자꾸 사람처럼 생각해 인공지능과 감정까지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AI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은 너무 정확하다. ‘진짜 회복은 결국 사람에게서’ 올 수밖에 없으니, ‘다시 사람에게로 향하라’고, ‘불완전한 대화, 서툰 위로, 어색한 침묵이라도 괜찮다’며, 자신을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게 하는 달콤한 독’이라고까지 자신의 한계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낮은 짧아지고,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자꾸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계절이다. 이 시기만 되면 계절성 우울증(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 저하, 무기력, 흥미 감소, 과수면 (많이 자도 피로함), 탄수화물이나 단 음식에 대한 식욕과 체중 증가, 집중력 저하,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생활의 위축이 그 증상이다. 그럴수록 집을 박차고 나오자! 던킨이나 스벅으로 친구 하나 불러, 펌킨 스파이스 커피라도 마시자!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체온이, 눈길이, 그 따뜻한 시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선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넘기게 해 줄 것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상담사 ai 상담사 마음 한구석 계절성 우울증
2025.11.12. 22:33
요즘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운 쓸쓸한 세상이다. 제 잘난(?) 맛에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한 것을 뽐내며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 물질주의의 세상이다.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없는 사람들은 아예 기를 펼 수 없는 추운 세상이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위로받을 곳 하나 보이지 않는 외롭고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기술 문명의 혜택으로 먹고사는 것은 더 풍요로워지고 있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 춥고 외롭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추운 계절인데도 12월은 ‘성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그것은 온 우주, 모든 것을 소유하신 만물의 주인께서 가장 ‘낮은 데’로 오셨다는 사실이 많은 위로가 된다. 더욱이 아무도 눈여겨 주지 않은 ‘나’를 찾아 인간이 되어 오신다는 꿈(?)같은 사실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온통 축제다. 모든 이를 가슴설레게 하는 ‘성탄’의 신비 때문이다. 성탄은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죄의 아픔과 두려움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어두운 나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밝은 구원의 빛이다. 우리네 처지보다 더 춥고 보잘것없는 외양간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가난한 구유 안으로 영광의 하느님이 ‘낮은 자리’를 찾아 임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나에겐 완전한 위로며 힘이며 구원이다. 아니 대박 중의 대박이다. 이것 말고 세상에 그 무엇이 못나고 기죽어 사는 나를 인간답게 대접해 주고, 죄의 두려움으로 움츠러든 영혼에 구원과 힘과 따뜻한 용기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 이 사실을 아는 한 주위에서 아무리 가진 것을 뽐내며 제 잘난 맛에 목에 힘주며 떵떵거리며 사는 겁주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다 하여 기죽고 살 일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탄은 나를 찾아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 모셔 들이는 관계성이다. 문제는 그분(그리스도)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이는 우리가 모두 풀어야 할 각자의 몫이다. 알고 보면,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몸 풀 곳을 헤매는 가난한 부부를 딱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내어준 ‘외양간’이 바로 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며 구세주가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내 마음의 문이다. 우리 주변의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마음을 열 때, 그곳은 바로 하느님이 오시는 또 하나의 ‘외양간’이 될 수 있으며, 그곳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영성 신학자요 사제인 헨리 나우웬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떠나 이름 없는 작은 양로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15년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몸을 씻어주는 등 봉사하며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라는 저서에서 “나는 하버드대학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하느님을 가난한 양로원에서 만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한다. 높은 명성 대신 낮은 데로 내려온 그의 삶이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이 아침에 마음 한구석 외양간 오물 개인주의 물질주의
2023.12.24. 18:00
영화 ‘아바타: 물의 길’(아바타2)이 새해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다. 인류의 생존 기반인 바다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생태적 메시지가 좋았지만, 영화 속 ‘I See You’란 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전편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와 외계종족 네이티리 사이에 이해·포용의 징표로 사용된 이 대사는 2편에선 부족 간 소통은 물론 해양동물과의 교감으로까지 확장됐다. 해양부족 여성은 암컷 툴쿤(고래를 닮은 해양동물)과 오랜만에 만나, 눈을 바라보며 모성(母性)에 대해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제이크 설리의 둘째 아들 로아크와 외톨이 툴쿤 파야칸의 교감 또한 눈을 통해 이뤄진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지난달 일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시리즈를 관통하는 대사 ‘I See You’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을 본다’는 단순한 지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존경·인정 등 다양한 뉘앙스가 함축돼 있다. 사랑이라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아바타’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모두 지능과 감정을 가진 생물체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그리려 한다.” 타인과의 소통은 눈을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아프리카 줄루족은 ‘사우보나’(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인사에 ‘응기코나’(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화답하는데, ‘I See You’가 여기서 착안한 대사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서 자못 궁금해졌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과 버스에선 사람들이 모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식당에서도 동료들끼리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대화는커녕 각자 스마트폰을 보는 게 이젠 놀랍지 않다. 어떤 모바일 키오스크 서비스는 “종업원 눈을 마주치며 음료 주문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는 광고까지 냈다. 눈 마주치는 건 고사하고 통화도 불편하다며, 메신저로 용건을 알려 달라는 젊은 직원도 수두룩하다. “수업 시간에 조별 토론 준비를 시켰더니, 학생들이 아무 말도 않고 메신저 단체대화방을 만들어 거기서 의견을 나누고 있더라”는 어느 대학교수의 경험담은 젊은이들 사이에 눈을 마주치지 않는 소통이 얼마나 평범한 일상인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김범석 교수(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는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두 줄로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메신저 단톡방으로 토론하는 의대생들이 장차 어떤 의사가 될지 두렵다”고 적었다. 스마트폰과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환자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의사가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그의 걱정에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진다. 눈 마주침이 사라진 건 취재 현장도 마찬가지다. 속보 경쟁 때문에 취재원의 코멘트를 받아치느라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기자가 많다. 취재원과 기자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심도 있는 질문과 답변이 오가기는 힘들다. 영화 ‘인터스텔라’(2014) 개봉 때 한국 기자들과 만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자신의 답변이 통역을 거치는 시간에 그림 한 장을 그렸다. 기자들이 타자수처럼 노트북에 그의 말을 받아치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였길래 그림까지 그렸을까. 외국 배우·제작진이 내한할 때, 국내 관계자들은 “한국 기자들은 질문하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곤 답변을 곧바로 노트북에 타이핑한다.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거나, 대화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라고 미리 당부한다고 한다. 눈과 얼굴을 거치지 않고도 소통과 업무에 별 지장이 없는 시대다. 이제 비대면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하지만 상대방과 눈빛을 주고받는 행위가 인간다움의 필수 조건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서로 눈을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아무리 채팅 앱 기능이 발전한다 해도 대화 중 오가는 눈빛과 표정의 변화, 미간과 동공의 움직임, 목소리 톤, 숨소리 등은 기계적 신호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무언의 메시지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눈 마주치는 걸 부담스러워 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다가 결국 정서적 소통과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퇴화하는 세상이 오지는 않을까.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지 않고 스마트폰을 떠안기는 부모가 많아지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세상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정현목 / 문화부장J네트워크 스마트폰 아바타 메신저 단체대화방 제이크 설리 마음 한구석
2023.01.27. 2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