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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김영애 작가의 마지막 편지

김영애 수필가의 장례식은 지난해 12월 열렸다. 그가 반평생을 보낸 LA의 메모리얼 가든에서다. 이역만리 머나먼 곳이어서 한달음에 달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영상으로만 영결식을 지켜보며 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필름을 되감아 보니 열네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난데없는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감명 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사는 교포인데 여건이 허락한다면 선생님과 교분을 맺고 싶습니다.”     김영애 작가가 보낸 편지였다. 그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글이란, 모 일간지에 쓴 나의 칼럼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김 작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어 시나브로 깊어졌다. 그 세월 동안 김 작가의 글솜씨는 일취월장이었다. ‘수필세계’ 신인상을 시작으로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무원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으면서 재미수필가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성취를 보여주었다. 김 작가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었고, 김 작가의 자부심은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깊어지던 2019년 봄, 김 작가로부터 우리 부부를 LA로 한번 초청하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처음엔 정중히 사양의 뜻을 밝혔다. 공연히 폐를 끼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지난해 여름 다시 편지가 날아들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 이번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해후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결국 초청에 응하기로 한 건 ‘마지막 해후’란 표현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나는 마침내 LA 땅을 밟았고 김 작가와 해후했다. 편지에 쓰인 것과는 달리 얼굴은 생각만큼 크게 축나 보이진 않았다. 내심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면서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염려의 그림자도 금세 걷혔다.   김 작가는 우리가 LA에 머무는 동안 관광지 여행을 다닌 날들 빼고는 숙소를 따로 정하지 않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 요즘처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일가친척조차 집에 들이길 꺼리는 세상에서 며칠간이나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그 배려심에 나도, 아내도 감동했다.   귀국하는 날 탑승 수속을 마친 뒤 헤어지는 아쉬움에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침내 헤어질 시간이 왔다. 나는 김 작가의 손을 부여잡고 어쨌든지 건강 잘 챙기라며 신신당부했다. 대합실을 빠져나오면서 김 작가 부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귀국하여 반년 남짓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메일이 날아왔다. “이 편지는 아마도 교수님과 저와의 마지막 사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교수님과 문학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어서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책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 사연’이란 구절이 마음에 걸려 줄곧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작가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편지가 오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순간 너무나 허망해져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동안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의 구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영원한 이별이 이다지 서둘러 찾아올 줄 미처 몰랐다. 나는 태평양 바다 건너를 향해 손을 모으고 김 작가의 왕생극락을 빌고 빌었다.   이역만리로 맺어진 인연의 꽃은 이렇게 피었다 졌다. 김 작가와 이승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나 보다. 하지만 내 마음속 인연의 꽃은 이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영원히 피어있을 것임을 믿는다. 곽흥렬 / 수필가이 아침에 김영애 편지 마지막 편지 김영애 수필가 마음속 인연

2025.07.2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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