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찰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 LA경찰국(LAPD) 소속 한인 경관 고 니콜라스 이(한국명 이정원)씨의 10주기 마지막 추모행사가 열렸다. 7일 LAPD가 주관한 행사는 글렌데일 포리스트론 묘지에서 가족, 친지, LAPD 소속 경관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톨릭 추모 연도(위령 기도)가 진행됐다. 생전 할리우드 경찰서 소속이었던 고 니콜라스 이 경관은 10년 전인 2014년 3월 7일 베벌리 힐스 지역에서 순찰을 돌던 도중 대형트럭이 순찰차를 덮치는 교통사고를 당해 순직했다. 그는 대한장의사 대표 이흥재(75)씨와 마당국수를 운영하는 이정자(71)씨 부부의 2남1녀 중 장남이다. 부인과 딸 둘이 있다. 이날 유가족들은 올해 10주기를 끝으로 고 이 경관의 추모 행사는 마지막이라고 발표했다. 아버지 이흥재씨는 “지난 10년 동안 매년 저희 아들을 기억해주시고 추모행사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송구스러운 마음에 공식 행사는 올해까지만하고 다음해부터는 가족끼리 지내려 한다”고 말했다. 이 경관은 1988년 LAPD 제복을 입고 2014년까지 16년간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2014년 3월 7일 베벌리힐스 로마 비스타 드라이브와 로버트 레인 교차로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던 트럭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이 경관의 차량과 정면 충돌했다. 동승했던 여성 경관과 트럭 운전사도 큰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당시 신참 훈련담당(training officer)이었던 이 경관은 경찰학교를 졸업한 지 3개월이 된 신참 여성 경관과 함께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하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관의 오랜 친구인 LAPD 토니 임 공보관은 “당시 과도하게 실린 적재물로 인해 트럭이 주택가에서 통제력을 잃으면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면서 “좋은 친구이자 누구보다 커뮤니티를 위해 열정 넘치게 일했고 모범을 보였던 훌륭한 경관이었다”고 그를 기억했다. 이날 어머니 이정자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엄마를 참 잘 따랐던 아들이다. 당시에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며 “그래도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아들이 좋은 곳에 갔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잊지 않고 아들을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경관이라고 아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수아 기자 [email protected]경찰 모범 저희 아들 소속 경관 여성 경관
2024.03.07. 18:53
LA기독교 윤리실천운동 설립자 유용석 장로가 지난 4일 97세의 연세로 소천했다.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아버지 같은 분이다. 공적으로는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을 LA에서 일으킨 시민운동가다. 장로님은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을 통해 교회 개혁과 우리 동족 돕기 운동의 큰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는 유년 시절을 만주에서 지내다가 해방 직후 북한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그 후 월남해 오랫동안 교편을 잡은 후 미국 이민와 수산물 수입 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교회를 겸손하게 섬기면서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두레 USA’ 와 ‘LA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대표를 오래 역임하면서 교회개혁운동, 도덕적 생활, 신앙운동, 북한과 조선족 돕기 운동 등을 이끌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기복 종교화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교회 개혁을 외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했고 교인들에게 정직하고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며 골수기증운동과 세금 바로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북한에서 아사자들이 속출할 때 매해 방문하면서 염소를 보내고 빵 공장을 세우고 병원과 고아원을 돕는 사역을 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눈에 띄는 사회활동보다는 개인생활에 있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였으나 개인 재산은 모두 남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한인타운에서 조그만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세 들어 부인과 함께 살았는데 그 중 방 하나는 늘 손님이 묵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재정적으로 돌보고 같이 살기까지 한 양자, 양녀가 수십 명이나 됐다. 그분의 구순 잔칫날 양자, 양녀가 모두 나와 축가를 부르는데 상당한 규모의 합창단 같았던 기억이 난다. 정말 수고하셨다. 천국에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 박문규 / LA기독교 윤리실천운동 대표추모의 글 신앙인 모범 la기독교 윤리실천운동 교회개혁운동 도덕적 한국 기독교
2022.04.06. 18:13
무대를 장악하는 지휘자는 분명 아니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1975년 뉴욕 필하모닉과 데뷔했을 때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이렇게 썼다. “지휘대 위에서 춤추거나, 가르치려 드는 지휘자가 아니다.” 일단 그는 수십 명에서 100명까지인 오케스트라 단원을 이끄는 일에 짜릿함을 느끼는 타입은 아니다. 인터뷰에서 스스로 “지휘에 맞지 않는 성격”이라 했고, 젊은 지휘자들에게 “카리스마가 지휘자에게 가장 위험하다”며 “훌륭한 연주자들이 실력을 발휘하도록 믿고 기다려라”고 했다. 오케스트라와 연습 시간에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지휘가 어떤 일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좋은 지휘자가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하이팅크가 82세이던 2011년. 지휘 경험이 50년 넘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겸손하다 못해 소극적인 성격과 정반대로 화려하다. 일류 오케스트라인 네덜란드 로열콘세르트허바우(RCO)를 1963년부터 27년동안 상임 지휘자로 이끌었다. 세계 여러 곳이 동시에 원하는 지휘자였다.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 런던 필하모닉, 미국 보스턴 심포니,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명성은 한평생 이어져 77세이던 2006년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됐을 정도다. 지휘는 리더십을 설명하기 좋은 직업이고, 하이팅크는 독특한 리더다. 어떤 머리 좋은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악보의 작은 점까지 외워, 연습 시간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단원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하지만 하이팅크는 “연주자들을 질책하지 마라. 지휘자는 더 많이 실수한다”며 후배들을 타일렀다. 또 어떤 지휘자들은 주목 받을 기회를 마다하지 않지만 하이팅크는 RCO의 대타 지휘 기회가 있었던 27세에 “준비가 덜 됐다”며 제안을 사양했다. 부드러운 리더십이라 한정하기엔 결기가 매섭다. 네덜란드 정부가 1982년 RCO 단원 일부의 정리해고를 계획하자 “네덜란드에서 다시는 연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 단원 숫자를 유지시켰다.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가 재정 위기로 공연장 1년 휴관을 결정한 2015년엔 사직서를 던졌다. 유튜브에 많이 남은 공개 레슨 영상에는 사랑받는 리더의 모범이 남아있다. 자신의 주특기이자 대표곡인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하는 젊은 지휘자에게 하이팅크는 이렇게 말한다. “작곡가 자신이 이 곡을 지휘했을 때 수줍음 많던 작곡가는 곡을 시작하지 못했어요. 단원들이 ‘선생님?’하고 부르자 그가 말했지. ‘먼저 하세요, 먼저.’ 이 곡에서 과시적인 소리를 내서는 안되는 이유예요.” 음악에 헌신했던 하이팅크가 21일 런던에서 별세했다. 강력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리더십을 되새겨본다. 김호정 / 한국 중앙일보 기자J네트워크 리더십 모범 상임 지휘자 오케스트라 단원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
2021.10.25.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