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또 간다고? 네가 우리보다 몽골에 더 자주 간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나의 몽골 친구들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사실이다. 나는 몽골에 자주 가고, 갈 때마다 한 달씩 머무른다. 나는 이제 내 몽골 친구들보다 더 구석구석 몽골의 각 지방에 대해서 안다. 나는 왜 몽골과 사랑에 빠졌을까. 세상의 모든 지역에는 독특한 아름다움, 특색, 그리고 얽힌 역사가 있다. 런던의 성숙한 빅 벤과 템즈 강, 파리의 세느 강변과 예술가들, 워싱턴 D.C.의 독수리 같은 위엄과 질서, 도쿄의 차분한 휘황찬란함, 서울의 밤낮 구분이 없는 활기와 분주함, 캘리포니아의 항구와 서퍼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흥분. 특히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예를 들어, 가치를 환산할 수조차 없는 미술관, 수만 년 역사를 소장한 박물관, 전 세계의 데이터를 모아 놓은 도서관, 신나는 놀이 공원, 뜨거운 함성으로 들썩이는 스타디움, 미슐랭 음식점, 젊은 두뇌들이 밤을 지새우는 대학들 등등. 몽골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이며, 제일 큰 도시이다. 그 외에 몇 소도시가 있는데, 그저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상 도시라고 하니까, 그렇게 불러 주는 것이다. 몽골의 전체 인구가 약 300만 명인데, 그 중 절반이 넘는 170만 정도가 울란바토르에 몰려있다. 울란바토르는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일 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현대 도시의 격은 없다. 몽골은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나라이다. 미국의 알래스카와 비슷한 규모의 큰 영토를 소유했으나, 인구가 매우 적고,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이어왔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과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몽골인들이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람보다 가축이 더 많다.” 사실이다. 그러나 몽골에만 있는 것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울란바토르로부터 멀어지면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선사시대’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지프를 달리면, 스테프(Steppe), 즉, 광활하고 건조한 평원에 만 년 전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곳에 도착하면 마치 타임머신에서 내리듯, 눈이 휘둥그레져 지프에서 내리게 된다. 과거의 발자취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선사시대를 만나게 된다. 이 21세기의 선사시대는 몽골의 서쪽 마지막 소도시, 울기를 지나, 알타이 산맥까지 펼쳐진다. 그곳은 지프나 트럭이 아니면 갈 수 없다. 그 선사시대에 들어서면 구약에 등장하는 목동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양떼와 함께 푸른 초장을 찾아 이동하고, 수개월 만에 혹 다른 목자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각자가 본 지방의 소식을 나누고, 우물을 두고 싸우고, 강도를 만나 양떼를 빼앗기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렵채집 생활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는 길이 없고, 이정표도 없고, 어떤 건물도 없고, 차도 없고, 심지어 나무도 없고, 공해도 없고, 어떠한 문명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다.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듬성듬성 난 풀뿐이다. 몽골의 스테프는,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육안으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무슨 말인가 선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서 거리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8차선 도로라든가, 10블록 떨어져 있다든가, 어느 건물을 지나 얼마 정도 가야 한다든지 등이다. 아무것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에서는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하루 종일 지프를 달리다 행여 멀리 점이 하나 보이면, 그건 양 떼와 염소 떼 수백 마리와 함께 걷고 있는 어떤 사람이다. 그 사람도 이쪽을 발견하고 멈춘다. 우리는 차로 한 참을 그 사람을 향해 달린다. 그곳에서는 타인을 만나기란 너무도 희귀한 일이라서, 서로 만나면 각자의 지방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야 목적지로 쉽게 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면, 어디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다든지, 어느 계곡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든지, 어디로 돌아가야 덜 추운지, 어디 초장을 향해 가고 있다든지, 혹은 어느 쪽으로 가야 몽골인이 거주하는 천막, ‘게르’를 만날 수 있는지 등을 알려준다. 몽골 유목민들은 풀밭을 찾아 1년에 4번, 계절마다 옮겨다닌다. 봄, 여름, 가을에 건초를 만들어 가축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대비한다. 그들은 게르를 세우는데 2시간, 접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단다. 그들은 야채를 먹지 않는다.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소금도 귀하다.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기 때문이다. 양념이 없는데, 그 흔한 후추도 없다. 그냥 말, 낙타, 야크, 양, 염소 등의 고기를 물에 푹 삶아 먹는다. 가축의 똥을 말려서 연료로 사용한다. 그들은 신석기인들이 남긴 암벽화 가까이에서 염소에게 풀을 뜯긴다. 신석기인들과 한 공간에서 호흡하는 선사시대의 일부이다. 내가 몽골에 자주 가는 이유는 그 선사시대가 주는 힐링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길이 없다. 내가 발을 내딛는 곳이 길이 된다. 문명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관계망에 나를 끼워 맞춰야 하는 의무가 사라진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나 압력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나 자체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곳에서는 별과 가까워진다. 밤하늘에 별 사탕을 뿌려 놓은 듯, 총총 빽빽한 별들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가망성을 마주한다. 별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다 보면, 영혼이 깨끗해짐을 느낀다. 뿌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던 서러움과 억울함이 녹아 사라진다. 그곳에는 문명의 병든 외로움이 아닌, 건강한 고독이 있다. 시계 없이, 사방천지 누구의 발자국도 닿지 않은 광야를 홀로 걷다 보면,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내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세밀하고 내밀한 나의 영혼의 소리는 나의 색깔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나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한다. 친구! 힐링이 필요하면, 몽골의 선사시대로 건너가 봐. 송마리 / 시인문예마당 선사시대 몽골 몽골 친구들 구석구석 몽골 몽골 유목민들
2025.05.29. 18:14
올 더위가 정점을 찍을 무렵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몽골로 피서를 갔다. 도시의 빛 공해 없는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알래스카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 자주 올려다보던 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새삼 깨달았다. 도시 불빛에 가려져 별을 못 보게 되면 하늘이 주는 교훈도 쉽게 잊어버린다. 몽골의 빛나는 은하수를 바라보던 나는 마음이 겸허해지면서, 같은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했다. 5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우주를 지구보다 조금 큰 정도로 여겼다. 중국 한나라 천문학자였던 장형(張衡·78~139)은 성표(星表)에 별자리 100여 개를 포함한 2500여 별들과 둥근 모양의 달을 묘사했다. 삼국시대(220~280)에는 별자리 283개와 1464개 별이 추가되었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918~1392) 역사서인 『고려사』는 1073년과 1074년의 신성폭발에 대해 세계적으로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부터 17세기까지 조선은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우주’보다 ‘하늘과 땅’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선야설(宣夜說)에 따르면 우주는 천체가 떠돌아다니는 무한한 공간으로, 인간은 우주의 심오한 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육안으로, 관측 도구로 볼 수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17세기 중반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정두원이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에게 받은 천리경은 조선의 첫 망원경이었다. 지난 7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에서 전송된 첫 사진이 공개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우주의 광대함과 그 역사가 되살아났다. 우주에는 최소 반경 460억 광년에 2조 개의 은하와 1024개의 별이 있고, 우리 은하만 해도 4000억 개의 별이 있다. 그러나 선조들에게 배운 바와 같이, 우주의 깊은 비밀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넓어질수록 인간은 이 광활한 세계에서 현재 속한 장소와 목적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1990년대에 ‘신(新) 유교적 휴머니즘’으로 유명한 뚜웨이밍(杜維明·82)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뚜웨이밍은 가족·공동체·국가·우주로 확장되는 자아의 물결을 동심원으로 표현했다. “각 사람은 개인적인 정체성, 즉 열려 있고 창의적으로 변형되는 개성을 찾는 과제를 풀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노력은 역설적으로,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능력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가족의 과제는 족벌주의를 초월해 공동체적 결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뚜웨이밍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민족중심주의와 문화우월주의를 극복할 때 사회적 통합을 이루며 부강해질 수 있습니다. 국가적 단결에 헌신하면서도 공격적인 국수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의 번영에 고취되지만 인류중심주의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인류애(humanity)의 참 의미는 인간-우주애(anthropocosmic)입니다. 인간-우주애적 정신을 가질 때 자아와 공동체가 소통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인류와 하늘이 상호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이상에 근거한 수양이 유교 인본주의 사상의 핵심입니다.” 내 속에 뿌리를 내린 이 사상은 내가 자연에, 또는 음악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심취할 때 밖으로 표현된다. 음악(音樂)은 동양에서는 ‘건전한 소리’, 서양에서는 ‘뮤즈의 기예’(music)를 뜻한다. 현재 나는 네덜란드계 독일 작곡가 코드 마이어링과 가야금 연주곡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가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악기는 우리 몸의 일부, 영혼의 일부와 같습니다. 우리는 악기를 만들어 신체적인 가능성을 확장하고 우리 내면의 상상, 미(美)에 대한 갈망과 열정을 표현합니다. 악기를 연습하는 무수한 시간 동안 우리는 악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꿈과 미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음악으로 인간-우주애적 자아에 도달함으로써 내면의 상상과 꿈을 공유하는 것. 나는 이것이 한국 풍류의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몽골 자작나무 숲속에서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거닐었던 어느 날, 우리는 사우나에서 몸을 녹이고 염소고기 만찬을 즐긴 뒤 부른 배를 안고 난롯가에 모여 앉아 악기를 조율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동심원으로 퍼져 나가는 소리의 물결이 서로에게, 숙소를 둘러싼 산맥으로, 산자락의 목초지로, 산 너머 하늘로 확장되었다. 해 저물 무렵 세 쌍의 무지개가 떴고 구름이 곧 걷혔다. 맑게 갠 밤하늘에 수십억 개의 별이 펼쳐졌다. 은하수는 우리의 음악에 맞춰 진동했다. 조세린 /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문화산책 밤하늘 몽골 우주애적 자아 우주애적 정신 동료 음악가들
2022.10.23.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