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쳤어?
대학 시절 무교동 골목길. 술 취한 남자 둘이서 싱갱이를 벌이는 장면. 한쪽이 비틀거리며 걷다가 다른 취객과 부딪친 후 사과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누가 누구 어깨를 먼저 밀쳤는지. “쳤어?” 하며 고함치는 소리가 침침한 골목을 뒤흔든다. 처맞기 싫으면 얼른 사과하고 냉큼 도망칠 일이다. ‘쳤어?’라는 이 질문형 외침에는 거부할 수 없는 도전의식이 공명음으로 깔려있다. 슈퍼마켓에서 몸이 가볍게 스쳐도 ‘Excuse me’를 난발하는 미국식 언어습관으로 보면 ‘쳤어?’는 순전히 한국식 말버릇. 맨해튼 타임스스퀘어에서 누가 술에 취해 몸을 세게 부딪쳐도, ‘Hey, watch out!’ 하며 외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지, 무교동 골목에서처럼 살벌한 전운(戰運)이 감도는 아우라는 여간해서 피어나지 않는다. ‘쳤어?’를 직역해서, ‘Did you hit me?’ 라고 소리쳐도 얼른 뜻이 통하지 않는다. 충동을 제어하는 기능이 허술해진 두 사람 사이에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설정이 얼른 성립된 후 즉각 몸싸움으로 직행하고 싶은 뉘앙스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쳤어?’는 상대의 적대적 행위를 확인시키는 현재완료형이 순식간에 현재진행형으로 돌변하는 분기점인 것이다. ‘치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주로 동사로 쓰이면서 접미사로도 변화무쌍하게 활용되는 매우 묘한 말이다. ‘때리다’, ‘(새끼, 가축을) 키우다’, 또는 어떤 가상적 상황을 인정하며 “그건 그렇다 치자” 하며 심드렁하게 말할 때처럼 동사적인 의미가 활개를 친다. 접미사로 말의 묘미를 더하는, ‘밀치다’, ‘놓치다’, ‘뻗치다’, ‘부딪치다’에서는 동작의 강도가 센 경우를 제시한다. 문법에서는 이것을 ‘강세 접미사’라 하느니. 나는 지금 고등학교 국어교사라도 된 기분이지만, 이제부터는 ‘치다’가 언뜻 겉으로 보이는 동작의 강도를 떠나 당신과 내가 처하기 쉬운 감성적인 면을 분석해 볼까 하는데. 직업의식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정신과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면서. ‘치다’로 끝나는 긍정적인 말로는 ‘가르치다, 깨우치다, 고치다, 뉘우치다, 뭉치다’ 같은 것들이 있다. 꽤 건설적인 내용이다. 반면에 ‘치다’가 어둡고 부정적이면서 사람을 움찔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접미사로 쓰이는 경우는 어떤가. - ‘도망치다, 잡치다, 후려치다, 미치다, 훔치다, 사기치다, 공갈치다, 해치다, 삥땅치다, 땡땡이치다, 뒤통수치다, 설치다, 족치다’. ‘펼치다, 헤치다, 다그치다, 헤엄치다, 장난치다, 마주치다, 스치다, 용솟음치다, 사무치다, 소스라치다, 까무러치다’에서처럼 중립적, 혹은 발작적인 내용도 우리의 연구대상이 된다. 한 정당이 다른 정당에게 ‘쳤어?’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라를 운영하는 수순. 한 정치인이 다른 정치인을 “쉴드치는’ 작업에 몰두한다. 웬만하면 하나의 스트레스를 다른 스트레스로 덮치는 수법을 써서 ‘퉁치는’ 행위가 판을 치는 세상. 요컨대 정치는 무언가를 ‘치는’ 것에 몰두하는 법이다. 북치고, 장구치고, 또 다른 많은 것도 냅다 치고. 대학 시절 무교동 골목길 취객이 고함치면서 던진 말은 일종의 ‘rhetorical question, 修辭的 질문’이다. 수사적 질문에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관례다. 더더구나 술집 골목 같은 데서는 수사(修辭)의 한계를 존중하는 것이 제격이라 한다. 언변이 장난질을 치는 곳에서 언변의 끝이 도래한 다음에야 사태를 바로잡는 행동이 개시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골목길 취객 무교동 골목 강세 접미사
2025.12.09.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