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11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역에서 한 소년이 기차에 올랐다. 이름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이었다. 그 무렵 이미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의 명성을 얻어 연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그에게 고향에서 작은 소포가 배달됐다. 한 줌의 흙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조국 폴란드의 흙’이라 적혀 있었다. 쇼팽은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프랑스 여류 소설가이자 사교계의 별인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 모정과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지 생활의 고독과 우울에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쇼팽은 폐결핵으로 쿨룩거리고 있었다. 연상의 상드는 어머니처럼, 아내처럼, 간호사처럼 쇼팽을 보살폈다. 이들의 행복한 세월은 9년이 지나 끝났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국 런던에 도착한 쇼팽은 스코틀랜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해는 유난히도 추웠다. 찬바람과 눅눅한 기후는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극약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49년 10월 17일 끝내 눈을 감았다. 39세였다. 임종 무렵 머리맡에는 19년 동안 들고 다닌 조국의 흙이 있었다. 마들렌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쇼팽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이 울려 퍼졌다.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쇼팽의 친구가 관 위에 한 줌의 폴란드 흙을 뿌려줬다. 며칠이 지나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쇼팽의 또 다른 장례식이 거행됐다. 관도 없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만 매장됐다. 그 안에 쇼팽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친지들은 쇼팽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심장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줬다. 오늘이 쇼팽의 175주기다. 이런저런 행사가 이어지겠지만, 음악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가 말했던가. 예술에는 조국이 없다고….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쇼팽 무덤 프레데리크 쇼팽 폴란드 바르샤바역 조국 폴란드
2024.10.20. 18:00
너무 더운 7월이다. 새벽에는 서늘한 바람이 잠깐 불어온다. 일어나서 뉴스를 검색하던 중이었다. ‘문학 거장 앨리스 먼로의 어두운 가족사’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달 전 봄쯤으로 기억한다. 캐나다 작가 먼로의 부고를 신문에서 읽은 것이. 앨리스 먼로는 올해 5월에 92세로 생을 마감했다. 2017년에 절필 선언을 했고, 마지막 십 년 동안은 치매를 앓았다. 그런데 작가가 죽은 지 두 달 후인 지금, 난데없이 이 문학 거장에 대한 기사가 또 나왔다. 그것도 그녀의 친딸에 의해서, 마치 어머니가 죽기를 기다린 것처럼 말이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였다. 2013년에 캐나다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녀의 단편집 ‘디어 라이프(Dear Life)’를 읽으면서, 그 문체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그녀의 소설에는 캐나다의 척박한 시골에서 사는 일상인들이 등장한다. 집안일에 치여서 시름시름 죽어가는 병약한 어머니, 사양길에 접어든 농장을 운영하며 가끔 사냥하러 다니는 무뚝뚝한 아버지, 아버지의 사냥을 쫓아가서 딴 여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어머니에게 입을 다무는 딸, 이런 시골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아들들은 키우는 말처럼 주목을 받지만, 딸은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먹히는 닭과 같은 처지다. 먼로의 주인공들은 주로 여자이며, 그들은 피폐한 삶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한다. 작가의 단편을 읽고 있으면, 회고록인지 소설인지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그날 아침, 내 눈을 끌어당긴 기사는 뉴욕타임스의 어떤 기자가 쓴 글이다. 기자는 먼로의 딸이 캐나다 신문에 발표한 글을 바탕으로 다음의 내용을 7월 7일 자 신문에 기고했다. ‘엘리스 먼로는 딸이 어릴 적에 이혼했다. 딸 안드레아는 친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었다. 9살 무렵에 안드레아는 어머니가 사는 온타리오를 방문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외출했을 때, 계부는 안드레아의 침대로 다가왔다. 소녀는 성추행을 당했고, 이 사실을 말했지만, 부모는 모른척했다. 어머니는 계부와 끝까지 함께 살았고, 친아버지 역시 침묵했다. 안드레아는 어른이 된 후에 상담 교사가 되었다. 자신처럼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을 치유하는 직업을 선택했다. 현재 말 농장을 운영하면서 온타리오에 살고 있다.’ 앨리스 먼로는 의붓딸을 강간한 계부의 이야기를 단편 소설로 쓴 적이 있다. 소설 속의 딸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현실 속의 딸은 조금 더 용감한 것 같다. 어머니 먼로는 문학계에서 정상에 올랐다. 캐나다 최초의 노벨상 수상은 시골 출신의 소녀가 이룬 세계적인 출세였다. 안드레아는 어머니의 명성에 흠집을 낼까 봐 몇십 년 동안 비밀로 간직했다. 명상으로 마음을 다독이고 사람들을 상담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평생을 두통과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신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다 고백하는 것이었을까? 계부도 친모도 세상을 떠난 지금,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신문 지상에 오르락 하는 것을 알 길이 없다. 무덤 속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는 먼로가 이 사실을 안다면 작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을까? 그녀의 허스키한 음성이 서늘한 새벽바람에 실려서 들려오는 듯하다. ‘그게 사람이야, 사람이 사는 모습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같아.’ ‘어쩌면 현실이 더 소설 같을지도 몰라. 흐흐흐…’ 열어놓은 창으로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목소리 무덤 어머니 먼로 앨리스 먼로 어머니 사양길
2024.07.22. 20:53
이제 부활절이다. ‘부활’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쳐부수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대 사건이다. 바로 기적 그 자체다. 인류 역사에서 이같은 기적이 일어난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예수 부활은 그래서 단 하나, 유일무이한 패러다임인 인류 역사의 정점이 될 수밖에 없는 최대의 대사건이다. 그래서일까? 2000년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워낙 그 사건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인지 ‘증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오죽했으면 3년간을 함께 생활했던 당시 그분의 제자 토마스마저도 직접 눈으로 그분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어렵사리 스승의 부활을 믿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거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나 단순하기에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증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 이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다. 무덤을 보면서 아무도 그 안에 묻혀 있는 사람의 주검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덤 자체가 바로 죽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서 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황한 과학적 증거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분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한마디로 나와 있다. 그 까닭에 ‘빈 무덤’은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의 해방이기에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시무시한 죽음의 원인인 질병과 사고, 재난,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공포마저도 우리를 가두어 놓지 못한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데살로니까 전서5:16)”라고 일깨워 주시고 있는 것 아닐까. 모두 행복한 부활절 보내세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열린광장 무덤 예수 예수 부활 예수 그리스도 무덤 자체
2024.03.28. 20:38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낼 수도, 산 자를 묻을 수도 있는 것이 말의 힘이다.” 하인리히 하이네·독일 시인한마디 무덤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시인
2021.12.23.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