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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이라고 다 같지 않다"

'비종교인도 다 같은 비종교인이 아니다.' 이스턴 일리노이대학교의 라이언 버지 정치학과 교수가 지난달 25일 '넌스(nones)'로 불리는 비종교인을 네 가지 부류로 분류한 글을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버지 교수는 정치학자이면서 종교사회학자로 비종교인 분석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비종교인 현상을 다루는 장기 연속 연구 '넌스 프로젝트'에서 적극적으로 종교를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집단을 분석해왔다. 버즈 교수는 최근 발간한 '논스 프로젝트(The Nones Project)' 시리즈에서 세분화된 비종교인의 구도를 제시하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집단으로 '열성 무신론자(Zealous Atheists)'의 정의를 새롭게 제시했다.   버지 교수는 비종교인을 ▶이름만 무종교인 ▶영적이지만 비종교적인 이들 ▶종교에서 완전히 떠난 이들 ▶열성 무신론자 네 집단으로 구분했다.   이름만 무종교인은 종교 행사 참석률이나 기도 빈도가 높은데도 특정 종교에 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이다. 영적이지만 비종교적인 이들은 전통 종교는 거부하면서도 명상이나 에너지, 운명 같은 뉴에이지 성향의 영성에는 높은 관심을 보인다. 종교에서 떠난 이들은 신의 존재나 내세를 믿지 않고 예배나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종교적 활동과는 완전히 단절된 그룹이다.   버즈 교수가 주목한 열성 무신론자는 전체 비종교인의 약 11%에 해당하는 소수지만 종교 비판과 탈종교 운동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그룹이다.   버지 교수가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라는 하나의 성격으로 묶여 있던 이들을 세분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다. 연구진이 비종교인들에게 "지난 12개월 동안 누군가에게 종교를 떠나라고 설득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약 10%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버지 교수는 이들 중 대부분이 열성 무신론자'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특히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토론 게시판이나 SNS에서 종교 비판적 발언을 주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버지 교수는 "이들은 단순히 종교를 믿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열성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활동을 완전히 끊지 않는다. 조사에 따르면, 열성 무신론자의 60%는 종교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지만 약 20%는 1년에 한 번 정도 예배에 참석한다. 비종교인 네 그룹 중 두 번째로 높은 참석률이다.   기도의 빈도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열성 무신론자의 56%는 기도를 전혀 하지 않지만 12%는 가끔 기도한다. 이런 경향은 열성 무신론자가 종교적 행위를 완전히 버린 비종교인과 달리 종교와의 접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지 교수는 네 개의 그룹에서 완전히 종교를 떠난 이들과 열성 무신론자의 성격이 대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완전히 떠난 이들의 성격을 피로감으로, 열성 무신론자를 투쟁심으로 묘사하면서 둘의 차이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한다.   완전히 떠난 이들은 더는 종교 논쟁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버지 교수는 "이들은 과거에는 종교의 의미나 신에 대해 토론했지만 이제는 '살고 싶은 대로 살되 나만 끼워 넣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반면 열성 무신론자는 여전히 '전투 모드'다. 버지 교수는 "이들은 종교에 대해 논쟁하고 설득하며 때로는 조롱한다. 종교와 마찰이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한다"고 분석한다.   나이에서도 차이가 분명해 열성 무신론자는 네 그룹 중에서 가장 젊다. 18~45세가 70%를 차지하며 35세 이하가 절반에 육박한다. 65세 이상은 12%에 불과하다.   반면 완전히 떠난 이들은 고령층 비중이 높아서 65세 이상이 3분의 1를 넘는다.   버지 교수는 이를 "비종교인의 세대 간 양상 차이"라고 분석한다. "완전히 떠난 이들이 오랜 종교 논쟁에 지쳐버린 세대라면, 열성 무신론자는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을 가진 젊은 세대다."   버지 교수는 이들을 레딧 등 온라인 커뮤니티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특성을 들어 '레딧 무신론자'라고 부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하늘 아빠(Sky Daddy)'나 '동화 같은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종교를 조롱하는 이들이다. 버지 교수는 "이들은 목소리가 가장 크지만 전체 미국인의 약 3%"라며 "실제로 비종교인 대부분은 종교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버지 교수는 결론적으로 "목소리가 크다고 3%가 전체 비종교인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많은 비종교인들은 종교를 싫어하기보다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버지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비종교인 연구에서 조용한 다수가 어떻게 종교를 바라보는지를 집중 조명할 것"이라며 "비종교인이 반드시 반종교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안유회 객원기자비종교인이라고 무신론자 열성 무신론자들 비종교인 분석 비종교인 현상

2025.11.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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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부활절, 무신론자의 십자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말일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은 어느 성직자의 단언이었다. 오래전 미국 유학 시절의 부활절 아침이었다. 2022년의 금요일이라는 달력 표기는 선명한 기독교 영향의 증명이다. 우리의 도시 풍경에도 기독교의 흔적은 충만하다. 석양이면 교회 첨탑의 십자가들이 빨갛게 떠오른다. 그런데 십자가들 아래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건축전공의 무신론자도 묻혀 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십자가를 물리적 구조물로 해석하는 건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   십자가라는 단어에는 형태가 선명하나 막상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 모양이 아니고 ‘T’ 형태였다는 주장, 그냥 수직 막대기였다는 의견도 있다.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stauros’가 굳이 십자가 형태를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의 형벌이니 라틴어가 중요할 텐데 ‘crux’ 역시 형태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건축적 관점에서 이들의 공통 문제는 불안정 구조체라는 점이다.   일단 재료부터 살펴보자. 이 지방은 목재수급이 좋지 않은 건조기후대다. 성서에는 고급건물 시공 목재로 레바논 삼나무를 수입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고난 성화에 등장하는 깔끔한 목재는 사형장에 쓰기 아까운 사치재다. 더구나 사람의 하중을 버텨야 할 구조재면 한 사람의 운반 중량을 초과한다. 올리브나무라고 가정해서 20㎝ 각재로 개략 계산해도 200㎏을 넘나든다. 수평부재만 형장까지 지고 갔으리라는 짐작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십자가를 세우려면 기초를 확보해야 한다. 탁자 위의 젓가락이 그렇듯이 십자가를 맨땅 위에 세워 놓을 수는 없다. 고정하려면 땅을 파야 한다. 십자가는 하중상 가분수 구조체다. 무게중심이 높을수록 구조 깊이가 깊어져야 한다. 어림잡아 지상 노출 길이의 절반 정도는 지반에 묻어야 고정이 가능하겠다. 그 깊이면 사람이 들어갈 너비로 작업공간을 확보하며 파나가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골고다는 바위 지형이다. 석회암이 무르다 해도 바위다. 물론 처형장의 상설 구덩이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십자가형은 수백 명 단위로 이루어진 기록도 있다.   시공이 본격적 문제다. 못 박은 사실은 명시되어 있다. 합리적 순서는 일단 십자가를 눕혀놓고 못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확보한 구덩이에 하단부를 넣고 십자가를 세운다. 이때 십자가를 임시 고정할 가설장치가 필요하다. 넓게 파야 했던 구덩이는 흙으로 메우려면 엄청나게 잘 다져야 하고 돌로 채우려면 필요량이 너무 많다. 수직부재가 이미 설치되어 있다고 가정해도 거기 수평부재를 걸어 연결하는 것은 어렵다. 두 부재는 확실한 고정, 구조역학 전문용어로 ‘모멘트컨넥션’을 이뤄야 하는데 고난도 기술이다. 더구나 매달린 사형수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테니 이 방법은 선택 가능성이 낮다.   십자가라는 구조물은 집행 이후 철거해야 한다. 십자가를 눕히려면 기초를 해체해야 하니 이때 기초는 연약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십자가를 세워두고 사다리로 예수를 내리는 성화가 많다. 그러나 허공에서 못을 빼고 인체 무게를 부담하는 공정은 건축적으로는 난공사다. 역학·시공 지식보다 신앙·열정이 앞선 화가들은 물리적 현실을 초월하곤 했다. 그 신심에 따라 십자가는 길고 높아졌다.   건축적 상상력으로 처형자 입장에서 재구성하면 십자가 형태는 ‘+’보다 ‘x’가 훨씬 합리적이다. 우선 역학적 안정구조이므로 얇고 굽은 목재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별도의 기초·가설공사도 필요 없다. 문제는 지게처럼 뒤를 받치는 부재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지고 간 것은 바로 이 부재가 아니었을까.   1968년에 예수 시대의 유태인 유골 무덤에서 대못 박힌 발뼈 조각이 발견되었다. 어느 쪽 발뼈인지 이견이 있으나 못이 복숭아뼈 뒤를 관통한 상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모습처럼 다리를 벌리면 가능해지는 자세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치욕적 모습이다. 그러기에 처형장치로는 더 적합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처형을 자원했다는데 ‘x’ 모양이었다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왜 십자가는 ‘x’ 아닌 ‘+’ 모양으로 알려졌을까. 우선 기독교 전파로 부활의 상징이 필요했는데 그게 텅 빈 무덤이기는 어려웠겠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메시아가 갑옷의 전사가 아니고 무력하게 처형된 죄수였다는 걸 설명하는데 곤혹스러워하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덜 치욕적이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 모양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십자가는 다만 고난의 표현이되 굳이 수모의 재현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곧 부활절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큰 십자가는 건물이다. 직사각형으로 시작된 대성당의 평면이 중세를 지나며 십자가 모양으로 변모해갔다. 부활이 없었다면 건축사도 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건축전공 무신론자 입장에서도 ‘x’가 아닌 ‘+’ 모양의 십자가가 다행스럽기는 하다. 도시 야경 곳곳에 빨간 ‘x’가 떠있다고 상상해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서현 /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중앙시평 무신론자 부활절 이때 십자가 십자가들 아래 고정 구조역학

2022.04.1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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