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모두가 굶주릴 때 나도 함께 굶는 건 참을 수가 있지만, 자신의 배가 부르다고 해도 남이 자기보다 더 잘 먹는 것은 못 참는 것이다. 물론 적당한 질투심은 필요하다. 노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투심이 지나치면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망가질 수가 있다. 질투는 감정이다. 감정은 합리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질투에 휩싸여서 비합리적으로 행동할 때, 마치 자신의 가치가 완전히 질투를 하는 대상이나 목표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사람, 혹은 그 목표가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질투나 집착의 감정이 심해지면, 스토킹을 하거나, 살인 또는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질투로부터 오는 고뇌와 고통을 치료하려면 그 첫걸음이 ‘인정’이라고 말한다. 먼저 자기가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패한다. 자기가 질투심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을 하고 난 후에 다음 순서는 질투를 느끼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것이다.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는 수밖에는 없다고 말이다. 기업은 가끔 소비자 별로 다른 가격을 받거나 고객을 차별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을 알아차린 소비자가 질투심을 느껴서 물건을 안 사는 경우가 있다. 마케팅에서는 이것을 ‘질투 효과(Envy Effect)’라고 부른다.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이 된 아마존이 창업초기에 겪었던 일화다. 아마존은 인터넷으로 가입하는 신규고객들에게만 책값을 할인해 준 적이 있었다. 아마존은 대규모 신규 고객 유치를 위해서 기존고객은 무시하고 신규고객들에게만 엄청난 할인 혜택을 주었던 것이다. 기존 고객들이 이 사실을 알아채고는 배신감을 느껴서 상당히 많은 기존고객들이 이탈을 한다. 당시 이 가격 정책은 미국의 텔레비전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결국 이러한 회사 정책은 아마존 닷컴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회사 매출에 커다란 타격을 안겨 주었다. 기업의 대부분의 수입은 기존의 충성도 높은 일부 고객들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급여 정보를 직원들 간에 서로 알지 못하게 한다. 직원별로 급여에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만일 모든 직원의 급여정보가 모두에게 공개가 된다면 대부분의 직원이 자기는 누군가 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회사는 직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급여 정보를 비밀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들이 실제로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A라고 하는 볼펜을 100명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이 볼펜에 대해서 평가를 하라고 한다. 1점부터 10점의 점수를 매기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100명에게 똑같은 모양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B라는 볼펜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 말고 다른 그룹에 있는 100명의 사람들이 이 펜 B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B라는 펜을 꼼꼼하게 살펴 보세요.” 그리고 B라는 펜을 살펴 본 사람들에게 다시 기존의 자신들의 펜 A에 대해서 재평가를 해 달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펜 A에 대해서 처음에 평가했던 것보다, 두번째에 훨씬 낮은 평가를 했다. B라는 펜을 보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훨씬 덜 가치 있게 느꼈던 것이다. 평소에 자신의 급여나 조건에 만족했던 사람도 다른 사람의 급여나 조건을 알고 난 후에는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덜 만족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질투 무죄 질투 효과 급여 정보 회사 정책
2024.05.23. 14:53
1797년 음력 윤 6월 2일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谷山) 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목민관 생활, 조선이라는 나라로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자 『목민심서』라는 위대한 고전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799년 음 4월 24일 부사직을 마치고 내직으로 들어오기까지의 1년 11여개월 간의 목민관 생활은 다산에게 『목민심서』를 저술할 경험과 지혜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본디 왕조 국가에서의 목민관은 작은 나라의 임금에 비길 정도로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목민관들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세상은 반드시 좋은 정치가 이룩되고 국태민안의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직접 체험한 곡산의 목민관 생활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그런 이유에서 다산은 곡산에서 행한 목민관의 업무를 참으로 섬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부임해서 퇴임하기까지의 보람 있는 업적들을 모두 기록하고, 목민관이라면 그렇게 행정을 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줘 목민관의 전범으로 남게 되었다. 『목민심서』에도 대부분 옮겨 기록하여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지침서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다산은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집중본)에 모든 사실을 기록했고 『사암선생연보』라는 책에도 그대로 기록했다. 목민관이라면 이런 정도의 일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모든 일의 전말을 자세하게 적었다. 가장 획기적인 일이고, 선진적이면서,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사건이 부임지인 곡산에 도착하면서 바로 일어났다. “부임하자마자 이계심(李啓心)의 결박을 풀어주었다(旣赴任解李啓心之縛)”라는 기록이 곡산에서 행한 첫 번째의 일로 나와 있다. 이어서 이계심 사건의 전말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계심이라는 자는 곡산의 백성이다. 앞의 원님이 다스릴 때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포보포(砲保布) 40자의 대금으로 (본래 200냥의 4.5배인) 900냥을 대신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때 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농민 1000여 명을 모아 관에 들어와 호소하였는데, 말이 매우 공손하지 못했다. 사또가 계심에게 형벌을 내리고자 했으나 1000여 명이 둘러싸고 대신 고문받기를 원하니 벌을 내릴 수가 없었고, 이계심은 탈출하고 말았다….” 점잖은 표현이지만 사실은 곡산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이다. 주동자 이계심에 농민 1000여 명이 합세하여 관아에 쳐들어가 ‘원님 물러가라’고 천지가 흔들리도록 구호를 외치며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상부로 보고하여 이계심은 5영에 수배가 내렸으나 민간들이 숨겨주어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조정에서는 부사를 파면하고 다산을 후임으로 임명한 것이다. 다산이 부임차 곡산 땅에 도착하자 이계심이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 12조목을 적은 서류를 제출하며 신임 사또 앞에 자수하였다. 군청에 따라온 이계심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린 정약용, 그야말로 200년 전의 일로는 혁명적인 재판을 하기에 이른다. 곡산으로 부임차 조정을 떠날 때 대신들은 모두 “민란의 우두머리 몇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당부했건만, 다산의 판결은 분명히 달랐다. 주문: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今日汝白放矣).” 참으로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주문에 이어지는 판결 이유는 더욱 놀랍다. 어찌 200년 전의 재판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목민관이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자신의 몸보신에만 영리하여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謨身 不以?犯官也).”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어도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일이다.”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라던 중앙의 대신들 분부까지 묵살하고, 벌을 주기보다는 천금으로 사야 할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잘못하는 관(官)에 강력히 항의할 때에만 관이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국민 저항권. 200년 전 전제군주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니 혁명적인 판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재시대, 관의 잘못에 항의하다가 얼마나 많은 국민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가. 비록 200년 뒤이지만 우리는 이계심의 전통을 이어 촛불로 항의하여 대통령을 파면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4.19, 5.18, 6.10항쟁 모두 국민 저항권의 발동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오늘의 현실에서 이계심의 외침이 새롭다.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외침, 시대고 해결의 열쇠는 거기에 있을 뿐이다. 박석무 /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실학산책 석방 무죄 부임차 곡산 목민관 생활 부임지인 곡산
2024.03.08. 22:51
이른 아침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윌슨 공원을 도는데 곁을 지나가는 한 백인여자 한테서 향수 냄새가 진동한다. 저녁에 뿌린 향수가 아침까지 가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에 뿌리고 나왔다면 그녀는 사랑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침 향수하면 즉시 떠오르는 한 장면 때문이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피트니스가 문을 닫자 아침 운동으로 해오던 수영 대신 걷기를 시작했다. 가까운 바닷가도 갔지만, 주로 우리 동네와 집 앞에 있는 작은 공원을 돌았다. 이른 시간에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다가 해가 밝아올 때쯤 되면 개를 산책시키러 나오는 사람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둑어둑한 시간에 마주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시안 할머니로 웅크린 몸과 비척이는 걸음으로 봐서 병색이 짙어 보였는데, 몇 바퀴를 쉬지 않고 도는 것을 볼 때면 큰 병을 앓은 분의 삶을 향한 집념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를 뵌 지 얼마쯤 지났을 무렵이다. 공원을 도는 체격이 건장한 백인 할아버지가 몇 번 눈에 띄었는데, 공원 저쪽에서 인기척이 나서 보면 두 분이 한자리에 서서 한참 대화를 나누거나 다정히 걷는 모습이 보였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두 분 모습이 잦아졌고, 뭔가 조마조마하면서도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기가 넘치고 걸음에 힘이 실린 듯 느껴지던 할머니가 아니나 다를까 그 새벽에 화장을 하고 향수까지 뿌리고 나오셨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 속이어선지 짙은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인적으로 몸에 향수 뿌리는 것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언젠가 메이시 백화점에 갔다가 화장품 매장 앞을 지나는데 매장 종업원이 조그만 샘플을 몇 개씩 나눠주어 칙칙 뿌렸던 적이 있다. 향도 기분도 나쁘지 않았음에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없어졌다. 향수를 유용하게 사용하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마음뿐, 선물 받은 몇 개는 화장대 장식용으로 진열되어 있다.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샤넬 N5를 입고 잔다”는 말을 남겨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프랑스의 ‘샤넬 N5’ . 누구에게 받았는지 기억도 없고 오래되어 거의 바닥을 보이지만, 선물한 분의 향기가 아련하게 전해져온다. 기록에 의하면, 향수는 향료를 알코올에 녹여 만든 것으로 인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다. 신께 올리는 제단에 향을 피우는 종교의식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향으로 질병을 없애고, 신들이 보호해주며 나쁜 영혼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유물에서 발견된 향수 용기와 왕과 왕비에게 향유를 뿌리는 모습이 담긴 벽화는 향수 사용의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향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미용과 치료에 적용했다.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화장과 함께 향료 사용을 즐겼는데, 로마의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던 비결 역시 허리춤에 숨겨둔 사향의 향수였다고 한다. 얼마 전 여행 갔다가 벌레에 물린 상처가 심해 수영 대신에 동네를 걷고 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가 잘 진행되고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가 동네를 혼자서 도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같은 시간 공원을 돌고 있을 할머니를 떠올리며 가슴이 싸해짐을 느낀다. 오연희 / 시인이 아침에 향수 무죄 향수 사용 향수 냄새 향수 용기
2022.07.15. 19:00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총을 쏴 2명을 숨지게 한 10대 청소년이 무죄로 풀려났다. 19일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 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배심원단은 2건의 살인과 1건의 살인미수 등 혐의로 기소된 카일 리튼하우스(18)에게 모든 혐의에 대한 무죄 평결을 내렸다. 리튼하우스는 지난해 8월 커노샤에서 흑인 남성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 총격으로 반신불수가 된 사건을 계기로 방화와 약탈을 동반한 과격 시위가 벌어지자 백인 자경단원들과 함께 순찰하던 중 시위 참가자 2명을 총격 살해하고, 1명을 다치게 했다. 당시 만 17세에 불과했던 10대 청소년이 저지른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서 총기 소유 권리와 자경단의 역할, 정당방위의 정의를 둘러싼 거센 논쟁에 불을 붙였다. 전국의 시선이 집중된 리튼하우스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26시간의 숙의를 거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라는 피고인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평결이 내려진 직후 리튼하우스는 눈물을 쏟았다. 그는 지난 11일 공판에서도 울면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자신을 때리거나 소총을 빼앗으려고 하는 등 먼저 공격한 시위자들을 어쩔 수 없이 쐈다는 게 리튼하우스의 주장이다. 변호인도 리튼하우스가 먼저 공격당한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방어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공공의식이 강한 10대 청소년"이라며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리튼하우스를 폭력적인 충돌을 유발한 "난폭한 자경단원"으로 묘사하면서 총격 사건 뒤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조사 결과 리튼하우스는 탄두를 금속으로 코팅해 목표물을 관통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풀 메탈 재킷' 탄환 30발과 AR-15 스타일의 반자동소총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평결 결과에 반발한 일부 시민들은 법정 밖에서 소리를 지르며 반발했고, 한 여성이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도 목격됐다. 재판 과정에서 미국 사회는 두 편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다. 총기 소유권을 옹호하는 보수 진영에서는 리튼하우스를 영웅시하며 정당방위가 맞다고 주장한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통제불능의 미국 총기 문화'를 상징하는 어린 자경단원이라고 비판했다. 시위대 무죄 무죄 평결 총기 소유권 평결 결과
2021.11.19. 1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