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자연으로 돌아가자
식물은 구걸하지도 싸우지도 않는다. 남의 것을 탐하지도 빼앗지도 않는다. 제자리에서 열심히 혼자 물 길어 올리고 햇빛과 입맞춤하여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자신이 피운 잎을 떨어뜨려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고 거기서 자양분을 얻는다. 동토에서도 새봄이 기지개를 켜면 싹을 틔워 부활을 현시한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고, 이를 위해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킨다. 물질문명이라는 도구가 인간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반면, 정신문명을 노래하던 문학은 이제 난해한 문자언어의 조합 정도로 취급받는다. 돈을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문학은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시와 소설은 서점 구석의 선반 위에서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다. 인류는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나? 하루가 멀다고 AI(인공지능)의 놀라운 발달 소식이 전해진다. 어느새 로봇의 배달 서비스, 무인 택시, 무인 상점이 등장했다.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은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철학, 종교, 윤리, 예술 등 정신문명은 점점 위축되고 있다. 이제 과학의 산물들은 인간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부속품처럼 됐다. 이로 인해 환경 파괴, 자원고갈, 기후위기, 핵무기 경쟁 등 인류를 위협하는 요소들은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다. 현대인의 정신적 공허와 소외, 우울증도 심해진다. 그렇다면 정신문명이 설 자리는 없는 것인가? 답은 있다. 너무도 평범한 진리이지만, 철학과 종교를 통해 인류의 궁극적 목적을 탐구하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과 감성을 일깨워야 한다. 또,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 ‘생태철학’의 실천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화한다면 물질문명 속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중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 물질문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잘못된 정신이 문제다.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이끌어야지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에 윤리를, 과학에 인간성을, 경제에는 정의를, 힘에는 사랑을 입힐 때 인류의 미래는 밝아지며 파멸을 넘어서 보다 나은 진보 (Progress for humanity) 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애리조나와 유타 주의 황량한 사막과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가 생명이 없는 ‘죽음의 땅’이든가? 겨울비 내린 뒤 그 사막을 가보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막의 꽃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곳은 ‘죽음의 땅’ 이 아니라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의 땅’ 인 것이다. 봄이 싹을 틔우면 여름은 이를 받아 구슬땀 흘리며 녹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가을을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옷을 준비하고 풍성한 수확물을 내놓는다. 그리고는 동면의 쉼을 통하여 푸른 생명을 또 준비한다. 자연의 법칙은 물질(과학)문명을 능가하는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우리 곁에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이상훈 / 시인·수필가발언대 자연 반면 정신문명 물질문명 자체 철학과 종교
2026.03.08.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