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 매우 작은 지역 내에서 실제로는 국가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독립 국가임을 주장하는 주체를 일컫는다. 일부 공동체는 실제로 독립을 선포했다고 주장하며, 통화나 국기, 여권, 메달, 우표 등은 물론, 상징물이나 자체 법률, 정부 기구까지 갖추어 운영하기도 한다. 1982년, 미국 국경경비대(United States Border Patrol)는 마약과 불법체류자의 유입을 막기 위해 플로리다 키스(Key West)로 들어가는 유일한 육로인 1번 국도를 차단하고 차량 검문을 실시했다. 그 결과 키웨스트에는 극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했고, 관광객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지역 경제에도 큰 타격이 발생했다. 키웨스트 시 의회는 미 연방 정부의 봉쇄 조치가 지역 관광 산업을 위축시킨다고 항의했지만, 연방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반발해 키웨스트 시장 데니스 워들로(Dennis Wardlow)와 시 의회는 같은 해 4월 23일, 상징적인 의미로 ‘콘치 공화국(Conch Republic)’의 독립을 선언했다. ‘콘치(Conch)’는 키웨스트 주민들이 주로 즐겨 먹는 소라를 뜻하기도 하고, 키웨스트 사람들을 일컫는 별칭이기도 하다. 지역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워들로 시장은 스스로를 콘치 공화국의 총리로 칭하며, 미국에 상징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당시 퍼포먼스로 미국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의 머리 위에 빵 한 덩어리를 내리치며 포고의 의사를 표현했고, 불과 1분 만에 같은 인물에게 항복하며 10억 달러 규모의 대외 원조를 요청했다. 결국 미 연방 정부는 봉쇄 조치를 철회했다.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콘치 공화국은 이후 지역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 매년 4월 23일이면 독립 기념 행사가 열리고, 키웨스트 곳곳에는 콘치 공화국의 깃발이 나부낀다. 이 상징은 관광상품으로도 활용되며 지역 경제에 부가가치를 더하고 있다. 도시만의 이야기가 도시의 가치를 끌어올린 셈이다. 그런데 백악관은 워싱턴 D.C.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이라면 워싱턴 D.C.의 백악관이 떠오르겠지만, 키웨스트에도 또 다른 백악관이 있다.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에 성공한 지 한 달여 만에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이 제3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냉전 시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에 미국과 세계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을 파병한 인물로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그런 그가 집무와 휴식을 병행하기 위해 키웨스트를 찾았고, 총 11차례 방문해 175일간 머무르며 사용한 별장이 바로 ‘리틀 화이트 하우스(Little White House)’다. 트루먼 대통령 이전에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머물며 무려 41개의 무기 관련 발명품을 만들었다. 이후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은 요양을 위해,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현재는 사적지이자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키웨스트의 대표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또 하나의 명소는 맬러리 스퀘어(Mallory Square)다. 이곳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 해군장관이었던 스티븐 러셀 맬러리(Stephen Russell Mallory)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과거에는 단순한 부두와 낚시터였으나,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웨스트 일몰(Sunset Celebration)’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이 축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가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향해 박수를 보낸 일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매일 일몰 두 시간 전부터 거리 공연, 푸드 카트, 예술품 전시가 열리며, 수많은 관광객이 “See you at Sunset!”이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맬러리 스퀘어에 모여든다. 분홍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석양은 이 도시에 또 다른 추억을 남긴다. 이곳의 맛을 대표하는 음식은 바로 ‘키 라임 파이(Key Lime Pie)’다. 라임(Lime)은 비타민 C가 풍부해 과거 영국 해군이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해 즐겨 먹던 과일이다. 향이 독특하고 레몬보다 단맛이 강해 미국 가정에서도 향료로 자주 사용된다. 플로리다 주는 라임의 주요 생산지이며, 그중에서도 키웨스트에서 재배되는 ‘키 라임(Key Lime)’은 크기가 작고 껍질이 얇으며 노란빛이 감도는 연두색을 띤다. 살균 효과가 뛰어나고 간 해독과 소화 촉진, 두통 완화에도 좋다고 한다. 키웨스트에서는 1912년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신선한 우유를 구하기 어려워 단맛이 첨가된 연유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 연유가 키 라임 파이의 커스터드를 만드는 데 적합했다. 특히 키 라임의 산 성분이 계란 노른자와 반응해 파이를 단단하게 굳히는 역할을 했기에, 처음에는 굽지 않고 만들어졌다. 현재는 식품 안전상의 이유로 짧은 시간 구워내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짙은 노란빛을 띤 키 라임 파이는 향긋하고 시큼한 맛으로 키웨스트를 추억하게 한다. 미국 최대 여행사인 푸른투어에서는 키웨스트를 포함한 다양한 여행 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색과 향, 이야기가 가득한 도시, 키웨스트. 그곳에서 해질녘 콘치 공화국의 바람을 느끼며 키 라임 파이 한 조각을 맛보는 경험은, 그 어떤 명소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Key West’s spirit, every hour is happy hour.”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미국 공화국 콘치 공화국 키웨스트 사람들 관광객 발길
2025.07.10. 17:51
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and he had gone eighty-four days now without taking a fish.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노인은 지난 84일 동안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는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바다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홀로 고기를 잡는 노인이었다. 그리고 지난 84일 동안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꼽는다. 짧고 강렬한 문체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잘 알려진 헤밍웨이의 작품들은 그의 치열한 삶과 더불어 수많은 이들을 매료시켰다.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9년 시카고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헤밍웨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대학 진학 대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군 입대를 지원했으나, 시력 문제로 좌절됐다. 이후 미주리 주의 한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 신문사는 기자들에게 짧은 문장 사용을 요구하고, 사건만의 독자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데 집중하도록 했다. 이러한 기자 생활은 훗날 헤밍웨이 문학의 핵심인 ‘빙산 이론’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최소화하되, 그 이면에 깊은 의미를 담는 기법)의 기초가 되었다. 모험심 많고 적극적인 성격의 헤밍웨이는 결국 9개월 만에 신문사를 떠나 전쟁을 직접 체험하고자 적십자사에 지원했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폭파 현장에서 200개가 넘는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이 체험은 훗날 1929년 출간된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의 밑바탕이 된다. 전쟁 후에는 다시 기자로 돌아가 유럽 특파원이 되어 파리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피카소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26년, 자전적 요소가 담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발표하며 25세의 나이에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1928년, 그는 키웨스트에 정착해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그가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했던 사람,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의 죽음은 헤밍웨이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의 작품 속에 슬픔의 정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그는 스페인,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작품의 배경과 깊이를 넓혀 나갔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종군 기자로 활동했고, 이를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종군 기자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현장을 취재했다. 이후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며 다시금 문학적 명성을 되찾았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전쟁 중 입은 부상과 비행기 사고 후유증, 그리고 점점 약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혐오감은 헤밍웨이를 무너뜨려 갔다.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1961년 자신의 엽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 운명에 맞선 인간의 내면을 평생 탐구하며 자신도 그런 삶에 온몸으로 부딪쳤던 사람,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침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바에서 술을 마시던 행복했던 시절의 헤밍웨이. 그가 머물렀던 곳, 바로 키웨스트다. 마이애미에서 1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42개의 다리를 건너면, 대서양과 멕시코만이 만나는 마지막 섬, 연간 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아름다운 섬 키웨스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헤밍웨이의 두 번째 아내 폴린의 부유한 삼촌이 결혼 선물로 사준 저택(907 Whitehead Street)에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을 집필했다. 이혼 후에는 하바나에서 돌아올 때만 이 집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던 그는 지인이 선물한 다지증(polydactyl)을 가진 메인쿤 고양이를 키웠고, 지금도 이 고양이의 후손 약 60마리가 헤밍웨이의 타자기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 그의 침실과 작업실 안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원 한쪽에는 부부 싸움 끝에 남은 1센트 동전 하나가 박혀 있다고 하니, 문학적 흥미를 넘어 인간 헤밍웨이의 삶을 엿보는 재미도 충분하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라면, 키웨스트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살던 집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헤밍웨이의 저택과는 달리 매우 소박한 이 집에 살던 두 작가는 같은 시기에 키웨스트에 있었지만, 실제 만남은 쿠바에서 단 한 번뿐이었다고 전해진다. 헤밍웨이의 단골이었던 "슬로피 조스 바(Sloppy Joe's Bar)"에서 그가 즐겨 마시던 칵테일, 모히토를 한 잔 마셔보는 것은 어떨까. 럼을 베이스로 한 민트와 라임의 청량한 향이 어우러지는 모히토 한 잔은, 그의 숨결을 느끼며 라이브 음악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매년 7월, 헤밍웨이의 삶을 기리는 행사와 그와 닮은꼴을 겨루는 콘테스트가 열리니 참고해보자. 푸른투어의 50개주 프로젝트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에는 마이애미와 키웨스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푸른 바다와 헤밍웨이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싶다면, 지금 전화해 보시길.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다."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순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미국 헤밍웨이 훗날 헤밍웨이 포크너 어니스트 멕시코 만류
2025.06.24.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