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연출하고 로버트 패틴슨이 주연한 SF 영화로,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Mickey7’을 원작으로 한다. 이야기는 미지의 행성을 개척하는 인간 집단 속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된 존재, ‘디스포저블 휴먼’ 미키7의 이야기다. 죽음을 당하면 기억은 데이터로 저장되고, 새 신체에 업로드되어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한 미션 후 복제가 진행되던 중, 미키7과 미키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설정은 단순한 공상과학이 아니라, 오늘날 기술 문명이 인간 존재에 던지는 철학적 도전을 압축해 보여준다. 특히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복제해도 ‘그 존재는 여전히 동일한가’라는 물음은, 영생과 존재의 본질을 묻는 신학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미키 17의 핵심 주제는 ‘죽음을 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가’이다. 미키는 죽음을 맞을 때마다 복제되어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지만, 그는 점차 자아의 혼란에 빠진다. 심지어 동일한 기억과 인격을 가진 또 다른 ‘나’(미키8)를 마주하며, 정체성과 인간성의 경계가 무너진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설정에 깊은 이의를 제기한다. 인간은 단순한 기억과 데이터의 집합체가 아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창세기 1:27)로 본다. 이는 물리적 신체나 의식의 연속성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고유한 인격과 소명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즉, 기독교에서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질’이다. 반면, ‘미키 17’의 복제 기술은 기억과 육체의 재생을 통해 존재를 ‘연장’할 뿐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도, 영혼도, 도덕적 책임도 없다. 이는 생명에 대한 ‘전능한 인간’의 환상이며, 죽음을 피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미키7과 미키8이 동시에 존재하며 ‘누가 진짜인가’를 두고 갈등을 벌이는 장면은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상징한다. SNS 속의 ‘나’, 회사에서의 ‘나’, 가정 속의 ‘나’는 모두 다르다. 기억과 역할은 같을지 몰라도, 진정한 ‘나’는 어디 있는가. 기독교는 여기에 명확히 답한다. “너는 너를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진짜 자아를 발견해야 한다.” 얼마 전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에서 마이크로칩을 뇌에 이식한 임상 성공 뉴스를 보았다. 우리는 기술적 영생의 길에 한 걸음 다가섰지만, 아직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우려스럽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미래의 인간상을 고민해야 한다. [email protected] 이종찬 / J&B푸드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미키 영생 기술적 영생 미키 17 인간 영생
2025.08.04. 18:55
봉준호 감독의 화제작 ‘미키 17’은 얼음 행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파견된 인간 탐험대의 일회용 직원 미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2022년 소설 『미키 7』이 원작이다. 주인공 ‘미키(Mickey)’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미키’가 영어 이름이긴 하지만 사실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이는 ‘마이클(Michael)’의 축약형으로, 좀 더 귀엽고 어린아이 같은 느낌을 주는 변형이다. 마이클이 미키(Mickey 또는 Micky)가 되듯이, 존(John)은 조니(Johnny), 데이비드(David)는 데이비(Davey), 제임스(James)는 짐(Jim)이나 지미(Jimmy)로 불리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이러한 애칭들이 독립적인 이름으로 정착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닉(Nick)은 니콜라스(Nicholas), 샘(Sam)은 새뮤얼(Samuel), 짐(Jim)은 제임스(James)의 애칭에서 유래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별개의 이름으로 쓴다. 반면, 미키(Mickey)처럼 여전히 애칭으로 주로 사용되는 이름들은 다소 유치하거나 미성숙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특히 ‘미키’라는 이름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키, 즉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 때문에 더욱 어린아이 같은 이미지가 강해졌다. 이런 점을 미뤄봤을 때 책이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약간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주는 ‘미키’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애슈턴은 “‘미키’라는 이름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려준다”고 말했다. 이야기 속에서 다소 어두운 주제가 다뤄지더라도, 이 이름을 통해 코미디 요소가 있는 작품임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 독자들에게 ‘미키’라는 이름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줄거리와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영국 영어에서 ‘take the mickey’는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비웃는다는 뜻의 관용 표현이다. 흔히 “Are you taking the mickey? (지금 놀리는 거야?)”처럼 질문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어떤 상황이 매우 짜증 나거나 불공평할 때도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0 pounds for a pint? Are you taking the mickey? (맥주 한 잔이 10파운드야? 지금 장난해?)”라는 식이다. 최근에는 장난하냐는 의미로 더 직설적인 ‘take the piss’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자칫하면 욕설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take the mickey’가 널리 사용된다. 짐 불리 / 코리아중앙데일리 에디터네이티브 잉글리시 mickey 미키 미키 마우스 반면 미키 에드워드 애슈턴
2025.04.02. 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