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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 극동 러시아와 만주의 한인 ,1895-1937’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마침내 다 읽었다. 저자 이혜옥 박사로부터 책을 받아 읽으며 가끔 덮어버리기도 하고, 한숨도 쉬고, 주먹도 불끈 쥐었었다.   책 제목은 칠십이 넘은 나이에 클레어몬트 대학원에 진학한 이 박사의 학위 논문 제목이기도 하다. 영어 원문을 번역한 각주만 59쪽에 달한다. 일본국립보관소,미국정부공문자료,러일 전쟁 정부 보고서,외교관 보고서,서양인 여행기 등 출처도 다양하다.   책에 빽빽하게 기록된 역사 자료들을 보다 서양인이 상투를 틀고 조선인 사이에 서 있는 ‘내 친구들…’ 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1904년에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한국에 와 5개월간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소속 잭 런던 기자가 남긴 기사와 사진들이었다. 그는 조선의 ‘게으른 양반들’, ‘가난한 일꾼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글로 남겼다. 그보다 앞서 한국을 네 번이나 방문해 3년간 머물렀던 영국 귀족 출신의 이사벨라 비숍은 여행기에서 한국인에 대해 ‘체력이 강하고 외모가 뛰어나다’고 기록했다는 내용도 있다.   19세기 말 조선은 비참했다. 이로 인해 목숨을 걸고 러시아나 만주로 떠나는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마을 전체가 이주하기도 했다. 계속된 홍수와 기근에도 농민들에게는 ‘백골징포’라는 무서운 세금이 있었다. 세금을 갚지 못하고 숨지면 자녀나 친척, 이웃에게까지 그 부담이 넘겨졌다. 또 1894-95 청일전쟁,1904-05 러일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바람에 전국이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집권 세력은 고종 황제를 둘러싸고 파벌 싸움만 벌였다. 이때 일본은 이미 한반도 지도를 만들어 수탈과 징용 등의 자료로 활용했다.     책에는 흥미 있는 내용도 나온다. 잭 런던은 일본군과 함께 이동하며 간단한 한국어도 익혔다. 그는 ‘어서!(Osau!), 바삐(Papee), 얼른(Ol-run), 속히(Sok-kee), 얼핏(Oil-ppit), 급히(Koop-hee), 냉큼(Ning-kom), 빨리(Bal-lee), 잠깐(Cham-kan)’ 등의 방법으로 한국어를 영문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또 1894~1897년 사이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은 나룻배를 개조해 강을 따라 여행하며 ‘조선의 관리들은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기록했다.     조선인들은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떠나갔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중국인도 많았는데 조선인들은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고유의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조선인 디아스포라 형성과 유지에 여성의 역할이 컸다고 책은 소개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에 러시아인을 정착시키기 위해 이주자에게 땅과 돈을 주기까지 했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돌아갔다고 한다. 특히 금광에서 중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조선뿐이었다. 1897년에 러시아를 찾은 비숍이 발견한 것은 비록 타향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지만 자신감과 긍정적인 모습의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은 피부색으로 인해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등에서 온 러시아인, 그리고 유대인이나 독일인처럼 지역 사회에 쉽게 융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조인인들은 주로 군기지 근처에 거주하며 육류와 채소 조달 사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만주에서 여윈 소를 사다 살을 찌운 후 양질의 소고기를 파는 등 사업 수완도 남달랐다. 비숍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국에서의 소심하고, 의심 많고, 움츠린 모습과 달리 솔직하고,남성적인 독립심을 보였다’고 썼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많은 디아스포라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수백만 명의 디아스포라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한국에서 재외동포청도 출범한 만큼 한국인 디아스포라 역사도 발굴해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아리랑 민족 아리랑 민족 조선인 사이 조선인 디아스포라

2024.03.2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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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제 78주년 광복절 기념 행사가 지난 15일 윌링 소재 약속의 교회에서 열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주제로 진행된 이날 기념 행사는 해병전우회 기수단 입장을 시작으로 윤석열 대통령 경축사(시카고 총영사 대독), 최은주 시카고 한인회장 기념사, 시카고 평통 회장의 축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으며 특별순서로 아리랑합창 기념공연이 펼쳐졌다. 아리랑을 편곡한 플래쉬몹 형식부터 모둠북까지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으며 광복 78주년을 기념하는 ‘한바탕 놀이 굿판’도 펼쳐졌다.   최은주 한인회장은 “지난 78년동안 대한민국의 발전이 눈부셨다”며 “시카고 한인회 슬로건인 하나로, 미래로! Better Together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더 나은 이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시카고 한인회는 공공 외교를 위해 오는 26일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열릴 예정인 K-Festival에 많은 한인들의 참여와 성원을 당부했다.     Jun Woo 기자역사 민족 기념사 시카고 최은주 한인회장 시카고 한인회

2023.08.1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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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열며] 민족의 노래 음악회

엊그제 6월의 따뜻한 주말, 북부 뉴저지의 한인 중·고등 학생들로 구성된 나눔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이라는 주제로 음악회를 열었다. 내가 나가는 교회의 지휘자이기도 한 나눔하모니를 이끄시는 단장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음악회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우리 청중들과 같이 불렀던 곡들은 우리가 학교의 기념식 때마다 늘 부르던 곡들이라 몇십년이 지났으나 그냥 술술 불렸다. 애국가부터, 삼일절 노래, 유관순 누나의 노래, 광복절 노래, 6·25 노래 등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흙 다시 만져보자!‘로 시작되는 광복절 노래와, 6·25 전쟁의 참혹함이 노랫말에 들어 있는 ‘전우야 잘 자라’는 지금도 내 가슴 한쪽 언저리에 얹혀있다. 솔리스트들이 부른 고향 생각, 비목, 가고파 등의 가곡들도 고국의 산천을 그려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세대는 나라 잃은 아픔을 잘 알지 못하고 살다가 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고 있지만 ‘흙 다시 만져보자’라는 노랫말 속엔 나라를 빼앗기고 뿔뿔이 여기저기 떠돌며 내 나라를 찾아 내조국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피 같은 한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를 찾아 고국의 땅을 밟아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그 노랫말 속에 다 들어있음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저 한인 2세들도 우리의 어릴 때처럼 연주하고 있는 그 노래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도하는 어른들의 설명으로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지금 나처럼 아무 생각없이 불렀던 몇십년 전의 노래가 언젠가는 가슴으로 절절히 와 닿는 날도 있으리라. 한 번, 두 번,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르고 또 부르면 그들의 머릿속에도 자동으로 입력되고 어디서부터였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한국 사람의 피가 시작된 조국, 대한민국을 알게 될 것이다.   가톨릭 교황이 여러 나라를 순방할 때,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서는 그 방문국의 땅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상징적이지만 방문하는 나라를 축복하며 사랑함을 몸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다. 조국의 흙 속에는 우리의 DNA도 섞이어 있을 것이며, 그 땅엔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사는 둥글고 넓은 따뜻한 모성이 있어, 길은 멀어도 바다를 향하여 기어가는 거북이처럼 늘 내 조국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진중 가요인 ‘전우야 잘 자라’라는 이 노래도 우리 어릴 때는 씩씩하고 명쾌한 행진곡처럼 신나게 불렀으나 오늘 다시 이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이 나의 목으로 차오른다. 죽은 전우의 시체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급박하게 앞으로 나가야 하는 나라의 존폐를 어깨에 짊어진 그들의 아픈 심정이 만져지는 시간이었다.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4절) 터지는 포탄을 몸으로 막으며 전진해야 하는 그 젊은이들의 목숨값이 아니었다면 선진국 반열에 선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내 앞줄에 앉아 있는 연주하는 학생들의 학부모인듯한 젊은 부부를 자꾸 훔쳐보게 된다. 그 노래들을 아나, 모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역시, 따라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아이들 또래인 그들을 보며 내 아이들도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담긴 이런 노래들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 대한민국을 전혀 모르는 손자들에게 이런 노래를 가르쳐 줄 기회를 어떻게 만들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이경애 / 수필가하루를 열며 음악회 민족 광복절 노래 삼일절 노래 우리 민족

2023.07.03. 21:28

[J네트워크] 중국민족

“중국은 역사상 한 차례도 한반도를 침략한 적이 없다.”   홍콩의 정치인 탕자화(湯家?·72, 영문명 로니 퉁)의 말이다. 탕자화는 과거 범민주파로 분류됐으나 2020년 친중 성향의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길(民主思路)’을 창당하며 정치색을 바꿨다. 홍콩의 내각 격인 행정회의의 민간 대표 중 한 명이다.   지난달 17일 탕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영국 왕관에 장식된 초대형 컬리넌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요구한다는 기사를 페이스북에 퍼 날랐다. 남아공 광산에서 캔 보물이라면서다. 탕은 “많은 나라가 전성기에 약소국을 침략하거나, 종교·문명·민주를 구실로 전쟁을 시작해 식민지나 속국을 만들며 우월한 국력을 과시하길 좋아했지만 ‘중화민족’은 달랐다”고 했다. 이어 “동남아 국가·한국·일본은 문화, 적어도 문자에서 중국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며 “하지만 중국은 이들 나라를 침입하지 않았다”고 호도했다.   지난 2020년 12월 중국 우주선 항아(姮娥)가 달 착륙에 성공하자 서구 여론은 중국의 달 식민화를 우려했다. 탕자화가 나섰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1930년 일본군이 중국을 침입했지만, 강성했던 당·명·청은 타국을 침입하지 않았고 식민지도 없었다.”   반발이 나왔다. 대만에 머무는 홍콩 국제정치학자 선쉬후이(沈旭暉) 옥스퍼드대 박사가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국과 북한 모두 중국 민족주의에 경계심이 가득하고, 특히 한반도 역사는 ‘사대주의’를 강력히 반대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은 수도의 중국식 이름을 ‘한성(漢城)’에서 ‘서울(首爾)’로 바꿨고, 북한은 ‘주체사상’을 앞세워 베이징 지령을 받던 당내 ‘연안파(延安派)’를 제거했다고 논박했다.   반면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국의 역사·문화재까지 ‘중국 조선족’이라는 ‘중국민족’과 애매모호한 ‘자고이래(自古以來·예전부터)’ 논리로 중국 역사로 바꿨다고 했다.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을 일컫는 이른바 중화민족은 ‘중국민족’이 보다 정확한 용어라는 게 선 박사의 설명이다.   과거 중국의 애국주의 누리꾼 주장을 홍콩 내각 인사가 퍼뜨린다. 중국 집권당은 이념보다 민족주의를 더 앞세운다. 5년 전 당 대회 정치보고는 중화민족을 43차례 외쳤다. 10년 전 18번보다 부쩍 늘었다.   선 박사는 탕 대표에게 한국이나 북한의 큰길에서 “중국은 한반도를 침입한 적이 없다”고 외쳐보라 했다. 관건은 우리다. 큰 나라를 따르려는 마음속 ‘중화’를 버리는 게 먼저다. 대신 중국민족과는 공생할 방안을 찾아보자. 신경진 / 베이징총국장J네트워크 중국 민족 모두 민족주의 대신 민족 한반도 역사

2022.10.23. 19:00

[독자 마당] 은혜를 아는 민족

한국전 72주년을 맞으며 미군의 희생에 대해 생각한다. 미군은 약 3만7000명이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장병 뿐만 아니라 사령관이 전사했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장성들이 자신의 아들 142명을 참전시켰고 그들 중 35명이 전사했다.     전쟁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시골 병원이었던 우리 집에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길게 늘어선 행렬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군 입대 면제를 받기 위해 진단서를 받으려는 젊은이와 그를 데려온 부모들의 줄이었다. 자기 나라 전쟁인데도 말이다.     나는 미군의 희생과 그에 대한 감사를 마음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사는 한인이나 단체가 봉사활동을 할 때 노란 유니폼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영어로 적을 것을 제안한다. ‘미국에 감사한다. 우리는 한국전 미군 희생자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은혜를 아는 민족인 한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자긍심도 커질 것이다. 애국정신 고취와 후세 교육 효과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라구나우즈 시니어 단지에서는 행사 때마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하고 앞에 언급한 문구를 적은 배너를 설치한다. 이를 본 미국인들은 고마움을 잊지 않는 한인들이 오히려 감사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혼자 외롭게 사는 미국인 할머니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많지만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이 불쑥 찾아가긴 쉽지 않다. 그래서 앞의 문구를 쓴 명함 같은 것을 만들어 한국전 때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라는 말하면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다.     한국인은 지구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정을 가진 민족이다. 이런 활동은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면서 보람찬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김홍식 / 은퇴의사독자 마당 은혜 민족 민족인 한인 한국전 미군 한국전 72주년

2022.06.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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