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
저는 이불을 꿰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바느질도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 잠깐 형식적으로 해 본 기억밖에 없습니다. 지겹고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최근에 춤 공연 때문에 한복을 맞추면서 바느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복이 비싸지는 이유라는 말씀도 덧붙였고요. 실제로 한복 전문가 중에도 디자인만 할 뿐 바느질은 안 하는, 또는 못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바느질이 필수였고, 그래서 참 고역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삯바느질이라는 표현에서 오는 아릿함이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대학생 시절 충격이었던 시인이었습니다. 국문과생이었던 저는 자연스레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국어학이 전공이었는데 말입니다. 하긴 중학교 때부터 비 오는 날이면 왠지 낭만적이 되어 시를 썼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 시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시인은 국문과를 나오거나 대학을 나오는 사람이어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사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박노해는 이름 자체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위한다는 의미여서, 공장에 취업한 대학생이 썼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아예 저 정도 실력이라면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공동 창작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늘 궁금했던 시인 박노해를 다른 글에서 만나게 된 것은 ‘노동해방문학 복간호’에서였습니다. 수배 중이던 박노해 시인과의 대담 기사였습니다. 목숨을 건 노동해방투쟁. 낯선 구호 속에서 저는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긴 수감 생활을 하였습니다. 체포되었을 때의 표정과 석방되던 날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맑은 얼굴이었습니다. 박노해의 여러 시를 읽으면서, 저는 뜻밖의 시에 마음이 갔습니다.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였는데, 밖에서 노동운동가며 혁명가로 살고 있는 자신이 집에서는 시키는 자로, 남자로 군림하고 있음을 부끄러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부끄러운 마음에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이불 홑청을 꿰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담담함, 선명함보다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저는 이 시를 한지에 써서 방문에 붙여 놓았습니다. 긴 시였기에 방문을 완전히 덮는 크기였습니다. 지금도 그 시는 제 가슴 속에 반성문처럼 남아있습니다. 저는 90년대 초에 학원에서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방학 때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가르쳤습니다. 그 중 한 편이 바로 ‘이불을 꿰매면서’였습니다. 중학생에게는 좀 어려운 시였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 설명하고, 느끼게 하면 오히려 쉬운 시였습니다. 그때 그 시를 용인해준 학부모께 지금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기 바랍니다. 얼마 전 고궁박물관에 갔다가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을 하는 카페를 지났습니다. 요즘에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진에도 뒷모습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전에도 가본 곳이라 이번에는 따로 들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지나친 권위입니다. 강약약강입니다. 제 삶에 이런 감정을 강하게 심어놓은 시는 바로 박노해 선생의 시였습니다. 그 외에도 박노해 선생의 시집을 여러 권 갖고 있습니다만, ‘나 그곳에 서 있다’라는 시도 가슴으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가을 시를 읽고, 시가 쓰고 싶어지는 하루이기 바랍니다. 박노해 선생의 이불을 꿰매며 첫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박노해 이불 시인 박노해 박노해 시인 박노해 선생
2025.09.28.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