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멋진 노익장에게 박수를!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낱말은 참 든든하다. 자주 듣고 싶은 말이다. 나이가 많음에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기차고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어르신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가을 산의 빛나는 단풍처럼 아름답고, 태양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로 잠기는 장면처럼 장엄하기도 하다. 사람을 감동으로 물들인다. 주위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도 대단하다. 최근에 나는 멋진 노익장 몇 분을 연달아 만나 젊은 기운을 듬뿍 받는 복을 누렸다. 큰 행운이다. 지난 11월1일에는 원로 방송인 위진록 선생님(97)과 한국의 정순진 교수가 나눈 손편지를 모아 엮은 책 ‘세월의 흔적’ 출판기념 잔치를 거들었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종기 시인(86)의 새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를 반갑게 읽었다. 그리고 며칠 뒤엔 원로 아동문학가 홍영순 선생이 새로 낸 책 ‘노인을 위한 동화’를 받았다. ‘세월의 흔적’ 위진록 선생과 한국의 수필가 겸 문학평론가 정순진 교수가 8년 동안 나눈 손편지 200여 통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속표지에는 ‘손편지: 아름다운 사연,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적혀있다. ‘태평양 세기 연구소(PCI)’ 스펜서 김 대표의 후원으로 발행되었다. 두 분이 나눈 편지에 무슨 거창한 철학이나 거대 담론을 담은 것이 아니고, 사람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 진솔한 사연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해준다. 두 사람 사이의 30년이라는 나이 차,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 LA와 한국의 대전이라는 거리를 훌쩍 넘어서는 인연의 힘, 손편지라는 아날로그 정서가 어우러진 사람냄새가 감동으로 스며든다. 뭐든지 편리한 것만 찾는 디지털시대에 대한 경종으로 들리기도 한다. 마종기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에는 80대에 들어선 이후에 쓴 시 43편과 산문 ‘영웅이 없는 섬’이 실려 있다. 마종기 시 세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이 시집은, 조국에서 쫓겨나 해외에서 디아스포라 시인으로 살아야 했던 지난 긴 세월의 고통, 그 고통 속에도 결코 허물어질 수 없었던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홍영순 선생의 ‘노인을 위한 동화’에는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11편의 동화와 함께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어 이채롭다. 책 제목이 아예 ‘노인을 위한 동화’다. ‘어른을 위한 동화’나 ‘성인동화’는 이미 좋은 작품이 많지만, ‘노인을 위한 동화’란 용어는 금시초문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위해 동화를 썼는데, 인생의 가을을 살면서 저절로 노인을 위한 동화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노인들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다루게 된다. 그러다 보면, 글에 철학적 신학적 깊이가 생기게 된다. 아무튼, 이참에 ‘노인 동화’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한편, 미술 쪽에서도 현혜명, 신정연 같은 원로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에서 보여준 과감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젊은 작가들보다 더 새롭고 신선하다.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대로 우리 미주 한인사회는 빠르게 고령화되어가고 있다. 새로 이민 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노령화를 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반이민 정책으로 이민사회는 더욱 위축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노익장의 존재가 한층 고마운 것이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의욕이나 기력은 더 좋아지는 상태를 키워야 우리 사회도 젊고 건강해질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노익장이라는 낱말을 ‘젊근이’ 즉 젊은 늙은이 또는 ‘농익은 청춘’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내 멋 대로의 생각이지만…. 멋진 노익장들에게 힘찬 박수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익장 박수 노인 동화 노인들 이야기 마종기 시인
2025.11.20. 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