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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미완의 ‘크레이지 호스’를 바라보며

지난달 필자는 사우스다코타주 블랙힐스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두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하나는 ‘러시모어(Rushmore)’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조각상이다. 이들은 미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각각 독립, 영토 확장, 연방 통합, 산업화 시대를 상징한다. 1927년 착공해 14년에 걸쳐 완공된 이 조각상은 미국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의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또 하나의 조각상은 아직도 진행 중인 미완의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조각상이다. 두 조각상이 세워진 블랙힐스는 원래 라코타 수우족(Lakota Sioux)의 땅이었다. 1868년 미국 정부는 라라미 조약을 통해 이 지역을 라코타 수우족의 영토로 인정했다.     그러나 1874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고, 연방정부는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했다. ‘러시모어’는 미국인의 자랑일 수 있으나, 원주민에게는 상처와 분노의 상징이기도 하다.   크레이지 호스는 리틀빅혼(Battle of the Little Bighorn) 전투에서 미 육군을 무찌른 라코타 수우족의 영웅이다. 그는 백인의 땅 확장에 맞서 싸웠고, 결국 체포되어 짧은 생을 마쳤다. 그의 조각상은 연방 정부의 도움 없이, 원주민 공동체의 손으로 1948년부터 지금까지 조각되고 있다. 77년이 지났지만, 얼굴과 쭉 뻗은 왼팔만 완성되었지 아직도 미완의 작품이다.   이 두 상징물은 미국이 어떤 나라였고, 지금 어떤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러시모어는 미국의 역사요, 자랑하고 싶은 함축된 상징이다. 반면 크레이지 호스는 인디언의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 지워져 버리기에 잊히지 않기 위한, 지금도 살아 숨을 쉬는 인디언 역사의 흐름이다.   이 두 거대한 역사의 흔적을 보면 소수민족인 우리 이민자들의 삶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102명의 조선인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바다를 건넜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전혀 다른 땅에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자긍심을 지켰고, 자녀들에게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미국 주류 언론과 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우리 선조들은 묵묵히 뿌리를 내렸다.   크레이지 호스는 단순한 전쟁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공동체의 전통과 정신을 끝까지 지켜낸 정체성 수호자였다. 오늘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이민자들 역시 그와 같은 현장에 놓여 있다.   이민 생활은 늘 ‘적응’과 ‘정체성’ 사이에서의 균형을 요구한다. 영어를 배우고, 현지 문화를 익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뿌리를 잃어버린다면 결국 나 자신도 잃게 된다. 크레이지 호스는 라코타의 전통과 언어, 삶의 방식을 지키는 것이 단순한 문화 보존이 아니라 존재 의미를 지키는 일임을 보여줬다.   오늘날 우리 이민 사회에서도 정체성의 위기가 나타난다. 한국어를 모르는 2세대, 한국 문화를 낯설어 하는 3세대는 단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문화 교육과 공동체 형성의 부족 때문일 수 있다. 정체성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크레이지 호스는 공동체 중심의 지도자였다. 그는 개인보다 부족 전체의 안녕을 우선했다. 이민 사회에서도 개인의 성공에 앞서,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중요하다. 교회, 한인회, 문화 단체를 중심으로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연결되는 일이야말로 이민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크레이지 호스의 정신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생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이 아닐까.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크레이지 미완 크레이지 호스 반면 크레이지 한국 이민자들

2025.09.1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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