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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왕사남’ 활줄의 비애와 사약(賜藥)의 본질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찾은 극장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만났다. 아내의 한국 방문으로 홀로 극장 나들이에 나선 것은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스크린 속 단종의 마지막은 익히 알려진 ‘사약’이 아닌, 차디찬 ‘활줄’에 의해 묘사된다. 조력자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그 처연한 장면 앞에서 필자는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어깨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사약(賜藥)은 사약(死藥)이 아니다. 역사적 기록인《조선왕조실록》은 단종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흔히 사람들은 목숨을 끊는 약이라 하여 ‘죽을 사(死)’자를 쓴다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줄 사(賜)’자를 사용한다. 즉,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마지막 하사품이라는 뜻이다. 신체 훼손을 극도로 꺼렸던 유교 사회에서 참형이나 교수형 대신 몸을 온전히 보존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은 왕실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예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약은 단순히 생명을 끊는 독물이 아니라, 왕실의 품격과 정치적 비정함이 뒤섞인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사약의 정확한 처방은 국가 기밀이었기에 오늘날 완전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부자(附子)와 초오(草烏) 같은 극독성 약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널리 언급된다. 이들 약재에 함유된 아코니틴(Aconitine) 성분은 소량일 경우 냉증을 치료하는 약이 되지만, 다량으로 사용하면 심장 마비와 호흡 곤란을 유발하는 강력한 독이 된다.   문득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과연 침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경동맥과 가까운 인영(ST9)혈이나 중추신경과 가까운 아문(GV15)혈 같은 혈자리가 떠오르지만, 실제로는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 침은 매우 가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침뜸의학은 본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의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국가 형벌의 수단으로 채택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약은 언제나 살리는 도구이지만, 권력과 결합할 때는 생명을 앗아가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한의학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바로 ‘용량의 미학’이다. 적절히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되지만, 권력의 도구가 되는 순간 사람의 생명을 끊는 사약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 역시 누군가에게는 기운을 북돋는 보약이 되기도 하고, 서서히 숨을 조이는 사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단종의 죽음은 조용히 시사한다.   왜 사약 대신 ‘활줄’이었을까? 영화 속에서 금부도사가 차마 사약을 내밀지 못하고 주저하는 순간, 단종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혹은 외부의 압박 속에서 ‘활줄’이라는 즉각적인 수단이 등장한다. 한방적 관점에서 보면 사약은 장기를 서서히 손상하며 타들어 가는 고통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활줄을 이용한 교살은 경동맥을 압박하여 비교적 빠르게 의식을 잃게 만드는 방식이다.   어쩌면 감독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왕실 권위의 상징인 사약보다는, 단숨에 끊어지는 활줄을 통해 단종의 비애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누에 실로 만든 활줄이라는 설정은 삶을 위한 도구가 죽음의 도구로 변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왕과 신하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관계의 끈’이라는 상징으로도 읽힌다.   영화 후반부, 엄흥도가 단종의 부탁을 받아들여 울면서 활줄을 당기는 장면에서 필자의 눈시울이 더욱 뜨거워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16년 전 열반하신 법정 스님께서 천장(天葬)을 위해 준비하셨던 보길도의 배 한 척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속 대사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강은 흐르고 또 흐르지만, 사람의 한은 강물처럼 흘러가지 않는구나.” “내가 먼저 가 있겠소… 부디 편히 사시오.”   어린 왕 단종의 비극을 넘어, 먼저 떠나간 이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겹쳐지며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차가운 활줄보다 더 시린 것은 어쩌면 권력이라는 독일지도 모른다. 그 독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한방의 시선으로 다시 되새겨 본 일요일 오후였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사약 활줄 사약 대신 반면 활줄 영화 후반부

2026.03.1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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