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시선] 나빌레라
한때 웹툰 ‘나빌레라’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다. ‘나비처럼’이라는 뜻의 제목만큼 그림체가 곱고, 일흔에 발레를 시작하는 은퇴 우편공무원과 그를 가르치는 발레리노가 꿈인 23세 주인공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웹툰 연재 시간에는 아주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지난 2021년 이 웹툰이 드라마로도 제작돼 춤추는 두 남자의 모습을 실감나게 TV로도 즐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솔직히 그전까지 발레하면 으레 발레리나에만 관심이 갔었다. 백조처럼 여리고 우아한 자태로 무대 위를 날아다니며 춤추는 발레리나의 모습을 보며 공연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나빌레라’ 이후 확실하게 눈길이 발레리노에게 갔다. 힘차게 공중을 날아오르며 선보이는 ‘제떼(한 발로 점프했다 다른 발로 착지)’, ‘아쌍블레(한 발로 점프했다 두 발로 착지)’, ‘앙트르샤(공중에서 다리를 교차하며 뜀)’ 등 발레리나에게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역동성을 발레리노에게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도 나빌레라 덕이었다. 흔히 발레를 여성 무용수가 주도하는 프랑스 예술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발레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남성 예술로 창안됐다. 당시에는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발레에 발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 16세기 피렌체 출신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비가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하며 다른 이탈리아 예술과 함께 프랑스에 전해졌고, 루이 14세가 발레에 열광하면서 귀족사회의 필수 교양예술로 발전했다. 여성이 발레 무대에 등장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프랑스에 번성하던 발레는 프랑스 혁명 당시 왕실·귀족사회와 함께 왕립 발레 아카데미가 붕괴하면서 인재들이 환영받던 러시아로 진출했다. 덕분에 러시아는 발레의 왕국이 됐다. ‘볼쇼이’나 ‘마린스키 발레단’이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 것도 프랑스 혁명 덕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도 발레는 장교학교에서 필수 훈련 과목이었을 정도로 남성 위주였다. 지난 7월24일부터 27일까지 코스타메사의 시거스트롬 홀에서 미국 최고의 발레단으로 손꼽히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지젤(Giselle)’ 공연이 있었다. 아돌프 아당의 음악에 장 코랄리, 쥘 페로, 마리우스 페티파가 공동 안무한 이 작품은 로맨틱 발레 대표작이자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기교를 선보일 수 있어 많은 발레리나, 발레리노가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최애 작품으로 손꼽는다. 기쁘게도 이번 지젤 공연에는 한인 무용수 여러 명이 출연했다. 오프닝엔 ABT의 간판 무용수로 활동하는 발레리나 서희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특히 26일 공연에서는 발레리노 안주원이 남성 주역인 알브레히트 백작 역을 맡았다기에 선뜻 26일 공연을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안주원은 대단했다. 그야말로 ‘나빌레라’, 무대 위를 힘차게 훨훨 날아다녔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그의 뛰어난 연기와 기량에 아낌없는 박수로 환호했다. 정말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중학교 때 키가 커진다는 권유로 이모의 무용교습소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안주원은 곧 재능을 인정받았다. 선화 예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하며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2013년 ABT에 입단해 현재 세계적 발레단이 탐내는 수석 발레리노로 우뚝 섰다. 놀랍게도 현재 여러 한인 발레리노가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활약하며 빛을 발하고 있. 이미 발레리나 서희의 뛰어난 활약으로 한인 커뮤니티에 친숙한 ABT에는 안주원외에도 한성우가 솔리스트로 활약 중이다. 마린스키 발레단에는 수석무용수 김기민과 전민철이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는 최영규가 수석 무용수로 13년째 더치 발레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또한 지난 2월엔 스위스 로잔발레 콩쿠르에서 16세의 박윤재가 우승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인 발레리노의 춤사위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니 이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안주원의 훨훨 날았던 지젤 공연처럼 한국을 빛내는 모든 한인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공연에 언제라도 날아가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유이나 / 칼럼니스트무대와 시선 발레리나 발레리노 발레리노 안주원 발레 무대
2025.07.30.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