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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배내옷을 접으며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더 넓은 집, 더 많은 경력, 더 화려한 인맥,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수많은 물건까지. 그렇게 하나씩 더하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의 무게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요즘 나는 집 안을 정리하고 있다. 오래된 책, 몇 해째 입지 않은 옷, ‘언젠가 쓰겠지’ 하며 쟁여둔 물건들이다. 손에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디다. 사실 내가 버리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집에 다녀간 큰딸이 내 마음을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엄마, 지금 조금씩 정리하세요. 나중에 우리가 버리려면 힘들거든요. 지금 집을 더 넓고 편하게 쓰시는 게 좋잖아요.” 딸의 담담한 말은 서늘하면서도 명쾌했다. 우리가 애써 모아둔 것들도 결국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리될 운명이라면, 지금 스스로 조금씩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아한 뒷모습이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에서 맏딸의 배내옷을 꺼냈다. 세월에 색은 바랬지만, 손바닥만 한 하얀 옷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작은 옷을 펼치는 순간, 낯선 타국에서 첫아이를 기다리던 젊은 날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한국의 친정어머니가 배편으로 보내주신 작은 상자, 백화점 ‘메이 컴퍼니(May Company)’에서 성별도 모른 채 하얀색 옷과 담요를 고르던 우리 부부의 설렘과 조심스러움. 그 모든 체온이 옷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밤마다 잠을 설쳐 가며 아이 곁을 지켰던 날들, 서툴지만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키우던 젊은 엄마의 시간, 그 시간을 차마 버리지 못해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깨달았다. 물건을 붙잡는다고 시간이 붙잡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배내옷을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다. 이것은 물건을 비우는 행위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아름답게 놓아주는 의식이었다.   물건을 비우는 일은 과거의 욕망과 미래의 불안을 덜어내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서랍 하나를 조용히 정리한다. 덜어낼수록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비워진 자리마다 고요한 바람이 드나든다. 남은 시간은 조금 더 단정하게, 그리고 나 자신과 더 오래 눈을 맞추며 살고 싶다. 엄영아/수필가이 아침에 배내옷 상자 백화점 메이 컴퍼니 서랍 하나

2026.03.3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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