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권력자의 양심, 시험대에 서다
사람의 생명과 죽음을 한 개인이 결정해도 되는가. 영화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가장 무거운 형태로 던진다. 그 나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법과 제도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 스스로 묻는다. “나에게 이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는가” 안락사의 문제는 종교·윤리·법·의학·인간의 존엄이 서로 충돌하는 영역이며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다. 그렇기에 법안 통과의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이 문제는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는 법률적 책임과 국가적 의무를 넘어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감정의 무게와 마주하게 된다. 2025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첫 상영 됐고 토니 세르빌로가 최우수 남우연기상을 수상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 작품 ‘라 그라치아(La Grazia)’는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고독과 회한을 그린 영화다. 여러 도덕적 결단들에 직면하면서 인간적으로 흔들리고 내면적으로 깊이 갈등하는 대통령의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로마, 정직과 위엄을 갖춘 가상의 대통령 마리아노 드 산티스의 임기 말. 그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인수·인계를 지켜보며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정치적 책임과 국가적 의무라는 외피가 벗겨지는 순간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외면해온 질문들과 직면한다. “법률가로서, 정치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았고 또 대통령으로서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 깊은 가톨릭 신자인 그는 40년 전 불륜을 저지르고 죽은 아내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다. 그의 딸 도로테아와의 관계도 그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대 차이는 단순한 가치관의 충돌이 아니라 그가 어떤 아버지였느냐는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도로테아는 그에게 정치적 이상과 윤리적 선택을 질문하고 그는 그녀의 당당함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확신과 젊음을 본다. 마리아노는 윤리적·정치적 중대한 결정의 기로 앞에 놓여 있다. 실제 이탈리아의 현안으로 떠오른 안락사를 승인할지, 그리고 배우자를 살해한 뒤 사형이 구형된 두 명의 범죄자에 대한 사면 여부를 놓고 종교적, 도덕적으로 깊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 죄의 정황·동기가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영화 제목 ‘라 그라치아(La Grazia)’는 단순히 사면이나 법률적 절차를 가르치는 말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은총’, ‘은혜’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정당성에 관한 내적 갈등이 담겨 있다. 영화는 이러한 은총의 의미를 그리고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주인공의 내면세계는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흔들린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족과 아내, 딸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였는지 되묻게 된다. 그리고 결국, 삶의 끝자락에서 “내가 떠난 뒤 무엇이 남을 것인가”라는 개인적 회한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는 제시되는 해결 방안 없이 소렌티노 감독 특유의 여백과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마리아노가 기로에서 내려야 하는 선택인 안락사 법안에 서명할지, 사면을 허가할지는 단순히 옳다 그르다고 평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 결정에는 언제나 책임과 죄책감, 그리고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윤리적 무게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마리아노는 대통령으로서 결정 앞에서 망설이면서 자신의 과거 상처 고독 속에 갇힌다. 권력의 반대편에서 권력의 허상과 무력함을 느낀다. 인간의 취약성에 그는 솔직해진다. 레드카펫 위에서 그는 가장 무력한 자신을 돌아본다. 소렌티노 감독의 최근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토니 세르빌로는 소렌티노의 ‘남자 뮤즈’ 또는 페르소나로 언급된다. 그는 노련한 존재감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21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배우, 알 파치노 이후 가장 깊은 내면 연기를 하는 유럽 배우라는 평가를 들어왔다. 소렌티노가 그리고자 하는 권력·명예·허영·내면의 공허를 표현해내는데 세르빌로보다 더 적절한 배우는 없다. 그는 이 영화에서도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내면의 파동을 미세하게 전달하는 달인의 연기를 보여준다. 한 감독과 배우의 지속적인 협업은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다. 감독이 배우의 잠재력을 알고 그에게 맞춘 역할을 설정할 수 있고 배우는 감독의 미학과 세계관을 깊이 파악한 만큼 더 섬세하고 온전한 연기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렌티노의 시적이면서도 냉정한 세계와 세르빌로의 절제된 내면 연기가 만날 때 그들은 서로의 의미를 확장하며 완벽한 파트너십을 완성한다. 소렌티노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세르빌로의 협업은 이탈리아 영화 내에서 권력, 명예, 시간, 허영, 존재의 의미 등을 탐구하는 데 있어 일관된 얼굴과 스타일을 제공해 왔다. ‘라 그라치아’는 과장된 미장센이나 현란한 연출을 특징으로 했던 소렌티노의 이전 작품들에서 한 걸음 물러난 보다 절제된 스타일로 주제에 접근하며 ‘침묵과 고독’, 그리고 ‘권력의 겉모습과 인간적 취약성’ 사이의 미묘함을 한층 더 깊고 성숙하게 표현한다. 소렌티노 특유의 충격과 화려하고 화려한 미장센 대신 보다 깊고 밀도 있는 도덕적 고찰과 은유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화려한 미술·카메라 워크·음악 등을 활용한 소렌티노의 미장센과 세르빌로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허한 연기는 그들이 탐구해온 ‘화려함 뒤의 고독’이라는 주제에 더 깊숙이 들어간다. 영화는 이탈리아 권력층의 정서를 담아내는 공간으로서 로마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로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성과 역사적 무게를 시각적으로 체화한 도시로 기능한다. 국가 행정과 의전이 펼쳐지는 장면들은 특히 인상적인 이미지로 포착되며, 그 공간 자체가 권력의 허세와 위엄, 그리고 그 속에 깃든 공허함을 드러내는 일종의 감정의 무대가 된다. 마리아노가 포르투갈 대통령을 맞이하는 공식적 의전, 그 화려함의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를 몽환적으로 처리한 장면이 압권이다. 정치는 이상이 아니다. 대통령이 추구하는 진실, 그 안에서 법과 도덕이 충돌한다. 그 간극의 중심에 이 영화의 핵심이 있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시험대 권력자 대통령 마리아노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 이탈리아 로마
2025.12.03. 19:16